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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이발관과 가동댁 할머니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 고마움을 표현하면 상대에게 기쁨을 준다.

by 권호원

신생아들의 머리를 배냇머리라고 한다. 아주 적은 양이 있거나, 약간 풍성하거나 아이들마다 다르다. 나의 배냇머리 상태는 기억나지 않는다. 1979년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친구들도 제법 있었지만, 가정에서 태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가정에서 태어난 신생아였다. 신생아들은 누워만 있기 때문에 배냇머리가 한쪽으로 쏠리거나 많이 비빈 아이들은 그 부분의 머리가 빠지기도 한다. 배냇머리가 잔뜩 자란 신생아들이 처음 머리손질을 할 때면 만만치 않다. 내가 아빠가 되었을때도 형제들의 성향은 달랐다. 차분하게 미용사의 손길을 기다리지 못하는 첫째와 반대인 둘째. 나는 어땠을까? 역시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발소를 처음 찾았던건 1985년 유치원 시절이다. 아버지 회사 (북후면사무소) 근처에 있던 아버지 단골 ‘대중이발관’이었다. 대중이발관에 가면 족히 20년은 돼 보이는 이발 의자와 하얀색 가운을 입은 주인 아저씨가 있었다. 처음 방문했던 기억이 생생하진 않지만,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발을 하면서 마음대로 움직일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위를 사용하는 이발이기 때문에 자주 움직이면 날카로운 가위에 상처가 날수도 있었지만, 그 분은 정도가 심했던 듯하다. 산만하게 움직이진 않았는데도 내 머리를 꽉 잡고 숙이는 자세를 취하게 하기도 했고, 앞머리 손질때는 눈을 꼭 감으라고 하셨다. 나는 짧은 머리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두상이 그리 예쁘지 않다. 오른쪽은 푹 커졌고, 그에 반해 왼쪽은 튀어나왔다. 오른쪽이 납작하고 왼쪽은 동그랗다. 왜 뒤통수가 삐딱해졌는지 모르지만, 짧은 머리로는 그것을 커버해줄수 없었다. 대중이발관 사장님은 그걸 이해해주시는 분이 아니었다. 인자하신 성격에 말씀도 재밌게 잘 하시는 분이었지만, 손님이 의자에 앉는 순간, 본인의 작품 세계가 확고한 과묵한 예술가로 변해버린다. 손님이 원하는 스타일은 없었고 오직 사장님의 스타일에 손님이 맞춰야 한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납작한 오른쪽 뒤통수를 보완하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한번도 표현해보적이 없었다. 대중이발관에서 이발하는 것이 별로라는 얘기를 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연예인 같은 사람이나 머리에 신경쓰는 것이다. 그러다가 염색해달라고 할거냐? 학생은 머리모양이나 패션보다는 공부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께 ‘대중이발관 별로야~ 뒷머리 너무 짧게 잘라’라고 여러번 하소연했다. 하루는 아버지 말고, 어머니와 둘이서 대중이발관에 간적이 있다. 역시 우리 어머니는 ‘나의 수호천사’였다. ‘뒤통수가 삐뜨니, 뒤통수 오른쪽 숱을 너무 많이 치지 말아주세요’라는 주문을 해주셨다. 그날 난생 처음으로 맘에 드는 헤어스타일이었다. 대중이발관 사장님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없었던 날임은 분명하다. 그날을 제외하고 어머니는 대중이발관에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을 제외하곤 내 스타일대로 이발을 한적이 없었다.

대중이발관이 무서운 이유는 스타일의 ‘압박과 강요, 선택 불가능’이 아니다. 바로 머리감기. 불편함의 정도를 상중하로 따진다면, ‘매우불편 상’이다. 요즘은 대부분 누워서 머리를 감는다면, 대중이발관은 두팔꿈치를 수돗가에 대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러면 난로위에 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과 찬물을 적당히 섞어서 온도를 맞춘다음 머리를 감겼다. 향긋한 샴푸향은 커녕, 빨래비누인지 세수비누인지 모를 비누를 거칠게 발라주셨다. 이후 부드러운 손길로 마사지하듯 머리를 문지르는게 아니라, 뾰족한 돌기가 듬성듬성 있는 플라스틱 제품으로 머리를 마구 긁으셨다. 뜨거운 물에 한번 놀랬고, 빨래비누에 두번 놀랬다. 마지막 놀라움은 바로 그 플라스틱 제품에 의한 두피 마사지였다. 엎드려 포폭 자세로 두팔이 고정된 상태, 빨래비누가 눈에 들어갈까봐 눈은 꼭 감은 상태에서 1분여간 지속된 돌기 마사지는 아파도 너무 아팠다. 아프면 참아라고 하는데, 통증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른것 아닌가.

두피 마사지의 목적은 빼곡한 머리카락 틈 사이의 머리카락 제거와 혹시모를 ‘비듬이나 이’ 제거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과도한 샴푸 린스 사용은 환경오염 주범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가정용 이미용 제품의 사용량과 환경오염의 인과관계는 복잡하다) 두피가 얼마나 얼얼하게 아프던지, 그러다 또 한 바가지, 뜨거운 물세례를 맞으면 찬물도 아닌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 이겨내야할 관문이 남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나서 집에 가려고 하면, 다시 이발의자에 앉으란다. 이유는 뒷목쪽의 면도과정이 남아있다. 국민학교 1학년이 면도할 거리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뒷목쪽의 잔털은 제거해주는 것이 좋다. 그런데, 전기 면도기가 아니라, 남자어른들의 면도도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냥 말그대로 칼이었다. 생선이나 과일을 자를때 사용하는 칼이 아니라 면도칼이었다. 검은색 플라스틱 손잡이에 스텐레스 재질로 된 면도칼은 예리해보이진 않았지만 날카로워보였다. 그냥 면도칼로 잔털 제거를 하려나? 아니다. 면도를 하기 위해서는 면도거품을 발라야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거품나는 하얀색 액체가 든 플라스틱 통에, 두께 5cm가량의 붓을 거칠게 휘젓으면 면도거품은 완성된다. 다시 꼼짝달싹 못하게 고개를 숙이고 난 이후 면도거품은 내 목덜미를 감싼다. 차가울까 뜨거울까? 당연히 매우 뜨겁다. 마지막 놀라움이다. 자세의 불편함과 머리감기, 그리고 면도칼의 두려움으로 인해 나는 ‘대중이발관’가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러나, 속절없이 자라는 머리카락을 묶고 다닐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앞머리는 눈썹 언저리에 있을 정도로 약간 긴편이었다. (그냥 일자 앞머리)

대중이발관을 피할 방법을 골똘히 고민했었다. 아버지의 단골가게였고, 아버지 회사와 2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막내아들 이발시키고 퇴근하기에는 딱 좋은 동선이었다. ‘대중이발관’을 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곳을 가야한다. 어머니가 자주 이용하시던 ‘중앙미장원’은 아버지 회사와 대중이발관 중간쯤 있었던 곳이다. 이발관(이발소)는 남자들이 가는 곳이고, 미장원(미용실)은 여자가 가는 곳이라는 믿음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 중앙미장원에 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동네에는 다른 성씨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안동권씨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집은 큰집이었다. (‘우리집 제사’ 참조) 동네에 있는 친척 어르신보다 나이가 어린 아버지가 왜 큰 집 종손인지는 알수 없었다. 특이한 점 한두가지 관찰되었다. 항렬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받았다. 안동권씨 몇대 자손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나는 37대손인데, 나와 비슷한 나이 가운데 나보다 항렬 숫자가 큰 사람은 본적이 없다. (항렬 숫자가 높으면 항렬이 낮다) 이것은 나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어르신들은 모두 아버지보다 한 두 항렬이 높았다. 심지어 아버지보다 한참 분들에게 ‘할아버지’ 호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큰 집이란 그런 것이구나. 하나 혹은 둘 이상 항렬을 앞서나가는 것이 큰 집이란 생각을 했다. 즉, 남자쪽은 안동권씨라는 공통점이 있어고 항렬의 위아래가 결정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녀들은 아버지의 성씨를 따른다. ‘OO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때는 할머니의 출신 지역을 따른다. 그것을 택호라고 한다. 어느 지역, 어느 지방 출신임을 붙여서, ‘안동댁, 영주댁, 의성댁’ 이렇게 시, 군, 읍, 면 단위의 택호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다른 도시에서 불리는 경우다. 안동은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지역적으로 넓은 편이었으므로 택호를 실제 지도 지명에서 찾기는 어렵다. 우리 동네에 권씨 할머니들은 ‘매산댁, 가동댁, 마니댁, 법석골댁 등’으로 존칭을 붙여드렸다. 권씨가 아니면, 그냥 ‘연화네 어머니, 동휘네 어머니, 옥란이 어머니, 우창이 어머니 등’으로 불렸다. 안동 권씨 집안 할머니들은 친척이라는 생각에 좀 더 가까이 지냈다. 특히, 가동댁 할머니는 당시로선 보기드문 일본분이셨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 제사 때 그 집에 가면 큰집의 막내아들이라고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특히, 가동댁 할머니는 ‘미용기술’을 가졌다. 그래서, 나의 배냇머리를 비롯해 유치원 시절 이전까지 나와 형의 미용을 담당해주셨다. 아주 세련된 가위질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보다 네살 많은 형은 가동댁 할머니의 미용솜씨보다는 ‘대중이발관’이 더 좋았나보다. 형은 대중이발관의 무례한(?) 손님대접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아니면, 대중이발관이 아닌 다른 이발관을 갔을수도 있다. 아니면 중학생이었으므로 스포츠 머리는 가동댁 할머니가 감당이 안됐을수도 있다. 유치원 이전까지 가동댁 할머니가 내 이발을 맡아주셨다. 그러다 유치원, 국민학교 입학하면서 나는 아버지 오토바이 뒤에 탄채로 ‘대중이발관’으로 향했다. 이발할 때마다 4번의 놀라움은 불친절을 넘어, 약간의 불편함과 공포로 다가왔다.

나는 다시 ‘가동댁 할머니’로 향했다. 너무나 편했다. 내가 가고 싶을 때 가면 되고, 돈도 들지 않았다. 머리를 감을 필요도 없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는 머리를 감겨주진 못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게 더 좋았다. 뜨거운 물세례와 딱딱한 강제 두피마사지를 겪지 않는다는게 행복이었다. 3학년 4학년이 되도록 한달에 한번 혹은 적어도 3개월에 2번 이상 가동댁 할머니에게 이발을 부탁했다. 사실, 어머니 아버지는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연세가 많으셔서 거동이 불편하거니와 어깨와 손목 등이 아프신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발할 때만 되면 그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한결같이 반겨주셨지만, 부모님 입장에선 여간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가끔 어머니와 함께 가동댁 할머니께 가면, 미안해하는 어머니에게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괜찮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게 정말 괜찮은 줄 알았지만, 사실 할머니는 시력이 많이 안 좋으셨고, 친척 손주의 이발을 해주시기에는 건강이 만만치 않으셨다. 할아버지도 편찮으셨고 자녀분들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자세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셨지만, 이젠 그만가라는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사실, 3학년이 지나고 4학년이 되면서, 변하지 않은 내 헤어스타일이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할머니께서 해주신 마지막 이발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국민학교 고학년 시절 할머니는 건강이 많이 안좋아지셔서 요양병원에 들어가셨고, 몇해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부모님은 장례식장에 다녀오셨지만, 여러 이유로 나는 장례식장에도 못가봤다. 학생이었던데다 장례식장은 꽤 거리가 있었던 듯하다.

어린시절 나는 인사성이 밝은 편은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엔 인사하지 않았던거 같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나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에게 인사하다가 무안해지는 기분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수 있다. 인사는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고, 나의 감사한 마음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표현해야 옳다. 가동댁 할머니에게 ‘이발요금’을 드린적 없다는 것보다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기억이 없어서 마음이 무겁다. ‘저 갈게요~’정도로 하고 돌아섰던 기억은 있다. ‘또 올게요~’라고 하기도 했고, ‘안녕히 계세요~’라고 한것 같기도 하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그 무게만큼 감사함의 크기는 커진다.

대중이발관의 불친절함으로 가동댁 할머니는 당신의 친손자도 아닌 어린이에게 ‘이발 재능 기부’를 하신 것이다. 같은 상황이면 나도 그럴수 있었을까? 역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이런데서 나오는 것 같다. 무언가를 바라고 하신 행동이 아니라, 그저 어른이니까 당연히 하신듯하다. 30년이 훌쩍 넘은 일이지만, 가동댁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는 눈앞에 아련하다. 가동댁 할머니가 말씀으로 가르쳐주신 가르침은 기억나지 않는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알려주신 가르침을 기억해야한다. 마음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말과 행동으로 고마움에 대한 감사함을 표한다면 가동댁 할머니는 더 기뻐하셨을테다. 10대가 지나고, 20대가 지나면서, 마냥 어리고 영원한 학생이고, 청년일수 없다. 어린이, 학생, 청년의 장점은 ‘실수해도 괜찮다’는 사회적인 응원과 지지가 포함된 ‘믿음’일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주는 어른들의 ‘믿음’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표현하는 습관을 길러보자. 분명 더 밝은 표정의 어른들의 모습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칭찬과 고마운 말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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