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원래 구기운동을 좋아한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소위 볼(공)에 대한 감각은 있었던 듯하다. 국민학교 2학년 시절부터 병식이와 캐치볼을 했던 것 같다. 3학년때는 정식이네 팀과 야구 시합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었던 듯하고, 4학년때 학교 육상부에서는 던지기 선수를 한적이 있다. 6학년때는 운동장에서 3층에 있는 우리 반으로 정확하게 농구공을 던진적 있다. 담임선생님이셨던 김기영선생님께 걸려서 혼난 기억이 난다. 유리창이 깨질뻔한 혐의와 마무리 청소가 완료된 교실에 운동장 흙이 묻은 농구공이 쏙 들어왔으니 놀라셨을 법하다. 어깨가 좋았던 것 같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우리 집안은 달리기를 못했다. (더 정확히는 안동권씨는 운동에 취약하지만, 당신네 의성김씨들은 문무는 물론, 예체능까지 강했다고 주장하신다. 내 기억엔 외가집 모임에서 그 현상은 더더욱 두드러진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어지간해선 처가집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안동권씨 37대손 둘째아들인 나는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다. 운동회때 공책도 8권에서 10권씩 받았다. 육상부였으니 더이상 운동신경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끝! 하지만 롤러스케이트, 스케이트보드, 인라인스케이트, 스키, 보드 등 발이 묶이는 스포츠나 수영, 다이빙 등 발의 안정감을 전혀 담보할 수 없는 물놀이는 굉장히 싫어한다. 자연히 축구, 야구, 농구 등에 관심이 많았다. 축구, 야구, 농구 어느것 하나 만만한 운동은 없다. 하지만 한 여름에도 뛰기만 해야할것 같은 축구는 싫었다. 안동국민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 좀 하는 수준이었지만, 축구부 친구들은 흙바닥 운동장에서 축구만 했다. 그게 싫었다. 수업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수업자체를 참여하지 않는 것도 싫었다. 안동중, 안동고 모두 축구부 친구들이 있었다. 친했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공통점은 축구만 했다는 것이다. 테니스로 전향한 친구들도 있었고, 부상당해서 운동을 그만둔 친구들, 대학 진학 이후에 축구선수와 지도자의 길을 걷는 친구들도 있다. 여러이유없이 ‘그냥’ 축구는 좋아하지 않았다. 프리킥 정도는 괜찮지만, 계속 뛰어야만 할 것 같은 축구는 자신이 없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다. 축구 잘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래 나는 졌다’ 하고 말았다.
야구, 야구는 장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한명이 할 수 없다. 안해본건 아니다. 국민학교 4~5학년 시절 우리집은 작은 리모델링이 있었다. 1975년도에 지은 집의 현대식 리모델링이었다. (우리집 리모델링 이야기는 ‘아랫목’이라는 제목의 글에 자세히 나와있다) 리모델링 이후에 남은 건축자재들이 좀 있었다. 목공 공사때 대패질이나 톱질, 못질을 하기 위한 탁구대 크기의 선반은 그대로 남아 형과 나의 미니 탁구대가 돼주었다. 거푸집을 만들기 위한 10cm 두께의 합판 몇조각을 세워놓으면 투수의 재구력 조절을 위한 작은 벽이 된다. 마당이 있는 집이었기에, 합판을 45도 각도로 세워놓고 테니스공을 힘껏 던지면 내가 던진 곳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올라온다. 합판을 더 세우면 내야땅볼을 연습할 수 있다. 눕히면 눕힐수록 내야뜬볼, 외야뜬볼 연습까지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야구는 혼자 할 수 없다. 투수, 타자, 포수, 수비, 심판, 기타 등등 여러명이 있어야 한다. (배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농구, 그래 농구는 혼자서도 할수 있다. 다른 스포츠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개인 훈련이 필요한 종목이다. 특히 드리블과 슛연습은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야구와 달리, 축구와 농구는 상대를 속이거나 따돌리는 운동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싫어하셨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는 바둑과 장기를 싫어하셨다. 바둑보다는 장기를 더 싫어하셨다. 상대를 속이거나 계획을 세워 곤경에 빠뜨리는 운동, 스포츠 자체를 싫어하셨다. 자기와의 싸움인 달리기, 턱걸이, 던지기, 높이뛰기는 괜찮았던것 같다. 돌이켜보면 농구는 시대적으로 딱 맞았다. 태어날즈음 시작된 프로스포츠였던 축구와 야구는 봄, 여름, 가을에 TV중개해주는 스포츠였다. 하지만 마땅한 겨울 스포츠가 없었던 시절 농구와 배구는 겨울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할 일없는 겨울철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중학교 1학년 마지막승부라는 MBC드라마, 중학교 2학년때 슬램덩크라는 일본만화, 그리고 강변농구대회라는 아마추어 동아리대회가 있었다. 생일로 학급 번호가 정해지던 국민학교 시절, 키로 정해지던 중학교 시절,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정해지던 고등학교 시절 12년을 통틀어 중학교 시절이 가장 뒷번호였다. 79년 5월생이므로 10번 언저리, 권씨였으므로 10번 안쪽이었던 것과는 달리, 중학교때는 1학년때 40번, 2학년때는 46번, 3학년땐 무려 48번이었다. 큰 편이었다. 축구부나 테니스부 포함하면 50번 전후였다. 거의 제일 크거나 한둘 빼고는 제일 큰 편이었다.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심장이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농구에서 키를 빼고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다. 제법 큰 키에 열심히 했던 슛 연습 덕분에 중학교 점심시간에 농구를 많이 했다. 학교 수업 이후엔 강변 농구대회가 열리는 ‘강변 농구장’에서 개인연습을 했다. 중학교 1학년때부터 매일 저녁 창환이랑 농구하러 갔다. 가면 다른 친구들도 있고, 지금 내나이정도 되는 아저씨들도 있고, 선배들, 후배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인맥도 쌓았다. 전설적인 이야기들도 들었다.
예로부터 안동에는 ‘사계’, ‘한울타리’, ‘칼립투스’, 그리고 ‘바구니’라는 농구클럽이 있었단다. 사계는 공부도 잘하고, 잘생겼고, 집안도 좋은 이른바 엄친아 부대들. 우승횟수 제일 많은 팀. 한울타리는 가끔 우승하는 팀. 친구가 필요하다고 하면 무엇보다 친구가 우선인 팀, 머리는 좋으나 공부는 안하는, 친구잘못만나 공부 못하는, 착하고 잔정이 많고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팀, 의리있고 선후배와의 유대가 강하고, 책임감이 있는 팀. 칼립투스는 슛이 매우매우 정확하고 개인기량이 좋은 팀. 바구니는 정식 코치로부터 배운 팀. 나? 나는 예상대로 ‘한울타리’가 되었다. 사계, 한울타리, 칼립투스, 바구니는 고등학교 팀이다. 중학교 팀은 다솜, 뉴드림, 샤이닝포스, 탄젠트90이다. 중학교 우승은 샤이닝포스, 준우승은 뉴드림, 다솜은 가끔 우승, 탄젠트 90은 연습경기때는 우승실력을 갖췄지만, 막상 시합에 나서면 말도 안되는 자은 실수 때문에 1회전 탈락하는 팀이다. 예상대로 우리는 탄젠트 90이다. (탄젠트 90은 ‘무한’이라는 뜻의 수학용어) 그냥 농구가 좋았다. 친구들이 좋았고, 흙바닥이지만 좋았다. 우승후보들을 이기고 정작 상금과 트로피가 걸린 시합에서는 1회전 탈락하는 ‘실전에 약한 아마추어들’이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만큼은 NBA 수준이었다. 긴장으로 1회전 탈락하지만 어느 누구하나 실수를 원망하거나 험담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그리고 한울타리가 되기전 우리들은 그냥 농구가 좋아서 농구하던 그런 친구들이었다. 권기돈, 서창원, 권오덕, 이경문, 서강수, 전형욱, 장필, 임헌수, 민상흠, 권호원. 경문이와 강수, 장필이는 연락이 되지만, 나머지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다들 잘 살고 있겠지.
탄젠트 90의 최고 성적은 중고등부 통합 3등이다. 고등학교 2학년때 대회였다. 탄젠트 90은 샤이닝포스, 바구니, 다솜, 뉴드림을 이기고 준결승에서 한울타리 3기 선배 형들을 만났다. 봐준건 아니지만 졌다. 그리고 선배들은 우승을 했고 우리는 3위였다. 우리가 거의 모든 강팀을 이겨준 결과였다고 하지만, 선배들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했고 우리는 드디어 한울타리가 되었다. 5기와 6기까지는 얼굴을 봤지만 그 이후론 잘 모르겠다. 한울타리 선배를 군대에서 만난적 있다. 나는 훈련병, 그 선배는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 그 선배도 그 대회를 잊지 못하고 나도 잊지 못하고, 이등병이 되기 이전 훈련병과 말년병장이 그 시절을 두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힘든 훈련병 시절 그 선배가 전역하기 전 1주일간은 아주 행복했다.
인디언들의 기우제는 반드시 성공한다. 그 이유는 비가 올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어느 구름에서 비올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혼이 담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한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자를 이길수 없다고 한다. 죽고 살고의 문제가 아닌 이상 양보와 배려,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을 위해서 ‘승부욕’보다는 ‘추억’을 향한다면 별 탈 없이 좋은 추억이 생길 것이다. 비단 농구뿐만 아니라, 인생의 선택에서는 늘 그렇다.
최선을 다하되, 나의 최선이 약간 모자라 행운을 바란다면 그때는 겸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기다릴땐 겸손해야하고,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결연함이 있어야 한다. 나는 농구를 통해서 협동정신과 배려를 통해 대인관계 지능 향상법을 배웠다. 혼자해야 하는 슛 연습에서는 끈기와 자기신체조절능력을 배웠다. 요즘도 승용차 트렁크에 농구공을 싣고 다닌다. 셔츠 차림에 농구공을 던질수 없지만 기회 있을때 농구코트와 골대가 보이면 옷 갈아입고 10분 정도 슛을 던진다. 3점슛이 들어가면 통쾌하지만 빗나가거나 튀어나오면 더 많이 튀어나가므로 가까운 슈팅만 한다. 림을 뱅글 돌아 그물망으로 빨려들어가는 그 느낌, 철썩 소리가 나는 정확한 슈팅의 느낌은 농구를 해본 사람만 안다. 몸은 둔해지고 드리블은 느려졌지만, 손바닥에 전해지는 농구공의 촉감은 언제나 설레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