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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목

걱정을 목표로 바꾸어라. 그러면 행복해 질 것이다.

by 권호원

지금 주거형태는 아파트다. 아파트에서는 윗목 아랫목이 없다. 어디나 훈훈하지만, 차가운 몸을 단번에 녹여줄수 있는 아랫목 같은게 없다. 아쉽다. 위풍이 심하긴 했어도 아랫목이 있던 어릴적 우리 집이 생각난다. 우리집은 1975년도 지어진 한옥이다. 1975년은 형이 태어나던 해로서, 형은 입버릇처럼 ‘이 집의 나이가 나의 나이와 같아~’라면서 상속인, 적임자, 맏이, 종손으로서 ‘본인 지분'을 어필하는 듯한 멘트다. ‘내 인생의 8할은 질투'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그 마저도 부러웠다. 왜 내가 태어나던 1979년에 짓지 않고 그렇게 일찍 지었단 말인가. 마음속으로 가진 불만 아닌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 불만은 5학년때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1975년에 지은 집은 1989년 즈음 되었을때 엄청난 불편함이 현실화된다. 입식 주방이라는 개념이 아닌 아궁이가 있던 부억은 춥기와 덥기가 반복되었으며, 커다란 고무 다라에 물 받아놓고 씻는것은 성장하는 사춘기 삼남매에게는 엄청난 불편함이었다. 실제로 형과 나는 부억에서 큰 고무 다라에서 엄마 손에 의해서 등짝을 맞아가면서 샤워를 당했다. 아련히 기억난다. 가스렌지가 아닌 석유곤로가 있었다. 불 지피는 아궁이도 기억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5학년때 비로소 구식 부억이 입식 주방으로 바뀌었다. 아궁이가 있던 곳을 많은 흙과 돌로 메워서 높인다음, 우리집은 주방과 안방, 중간방과 거실, 그리고 예전 사랑방까지 같은 높이의 집이 되었다. 부억으로 들어와서 신발을 벗고, 30cm정도 되는 안방으로 가는 것이 아닌, 대문에서 들어와 마당을 지나, 신발을 벗고 샤시 문을 열고 주방이나 안방이나 거실이나 사랑방으로 바로 들어갈수 있었다. 엄청난 공사였다. 그 공사의 주연이 바로 나였다. 방학때 이뤄진 일부 개조 공사에 공사주체인 ‘권태경 할배'의 진두지휘하, 나는 많은 심부름을 했다. (권태경 할배는, 동네에서 건축일을 하는 이른바 무자격이지만, 다양한 막노동 경험을 갖춘 저렴한 건축회사 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직원은 없다. 할배라고 하는 이유는 ‘태' 돌림자를 쓰는 나의 고조할아버지뻘이다. 아버지 보다 훨씬 어렸지만, 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 뻘의 항렬이므로, 아버지도 할배라고 불렀고, 나도 당연히 할배라고 불렀다)

형이 태어나던 해에 지어진 집을 현대식 양옥으로 내부 개조하는 과정에서 나는 혼을 담은 노력을 투입했다. 그러면서 집짓기를 비롯한 건축일에도 관심이 생겼다. 집을 짓는것은 참 매력적이고, 건축이라는 것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린 나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여름방학 열흘 남짓의 공사 기간 동안 많은 일을 했다. 시멘트, 타일, 줄눈, 미장, 샤시, 장판, 도배 등의 거의 모든 업무에 ‘감독관이자 심부름꾼'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자부한다. (자평한다)

예전 나무로 불을 지피던 아궁이가 사라지면서 보일러가 들어왔다. 보일러는 아랫목이 없다. 겨울 방학에 아궁이 근처 아랫목은 늘 누나와 형이 나란히 앉아 담요를 덮고 귤을 까먹으며 tv를 보기에 최적화된 지점이다. 관광지에 가면 ‘사진찍는 곳, 사진 잘 나오는 곳'처럼 tv보기에 가장 좋은 자리는 바로 아랫목이다.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혹은 화장실이라도 다녀올라치면 누나와 형은 이미 아랫목을 차지해버린다. 그럼 나의 선택은? 나는 형과 누나를 갈라놓아야 한다. 그 사이에 내가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내고야 만다. 방귀를 껴서 사이를 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까르르 웃었고, 6살많은 누나와 4살 많은 형 사이를 파고드는 힘과 눈치가 생겼다.

아랫목을 실제로 겪었지만, 아랫목에 ‘맏아들을 위한, 밖에서 일하고 오시는 아버지를 위한' 놋그릇 밥공기 보관은 낯설다. 아랫못에 앉아서 tv에 나오는 ‘육남매'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아랫목 이불 아래에 놋그릇 밥공기를 보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거 정말 옛날이야기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전기 밥솥 덕분에 생긴 변화랄까. 그 정도 옛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집 아랫목에는 놋그릇 밥공기는 없었지만, 콩으로 만든 메주, 추석 이후 감나무에서 딴 감이 단감으로 변화하는 ‘감 침수' 더미가 늘 함께 했다. 감 침수는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떫은 감이 단감으로 바뀌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곶감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감 침수는 감동 그 자체였다. 제사가 많았기 때문에 곶감을 마음대로 먹는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사 이후에 곶감은 먹을수 있었지만, 그 마저도 삼남매가 경쟁하면 막내한테 돌아오는 것은 많지 않았다. 곶감을 위해 칼로 감을 깎으면 나오는 감 껍데기를 말리면 곳감과 비슷한 맛이 난다. 감 껍데기도 생각난다.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을테지만, 당시엔 ‘변비'가 수시로 생길 정도로 많은 곶감과 감 껍데기를 먹어댔다.

2010년 즈음인가, 개그맨이자 오지탐험 전문가, 정글의 법칙에 나오는 김병만씨가 ‘혼자 집짓기'라는 것이 유행했다. 저렴한 금액으로 대지를 매입해서, 아주 조금씩 본인이 토목공사와 건축공사까지 마무리하는 과정이 책으로까지 나왔다. 결혼 이후에 일찍 내집마련에 성공해서 아파트에 살고 있을때다. 하지만, 아랫목에 있던 집을 개조하는 과정을 겪은 나로서는 언젠가 한번 예전 우리집을 내 손으로 고치고 싶다. 예전의 추억을 간직한 집을 우리 가족의 휴식과 행복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하는 꿈이 생겼다.

그런 꿈은 때론 부담이 된다. 부담은 걱정이다. 다름 아닌 시간과 돈에 대한 걱정이다. 내가 직접 살 집도 아닌데, 그냥 어린시절 추억에 시간과 돈을 쓴다는 것은 걱정으로 다가온다. 세상 모든 일은 걱정이면 괴롭다. 말 그대로 걱정은 전전긍긍하게 되고, 자다가도 벌떡깨는 그런 일들이다. 심지어 걱정이 많으면 잠이 오질 않는다. 하지만, 그 걱정을 목표로 바꾸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전 우리 집을 리모델링 해야하는데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는 걱정을, 집을 리모델링하기 위한 시간과 돈을 목표로 삼아보자. 시간은 계획을 통해 시간관리를 하면 되는 것이고, 모아야 하는 돈은 바로 ‘재무목표'가 된다.

해야할 일이 있다면, 시간과 비용이 동반될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히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 걱정을 ‘목표'로 바꾼다면 삶은 즐거워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막연한 걱정은 기대감보다는 실망감에 사로 잡혀 포기하기 싶지만, 계획이 포함된 뚜렷한 목표를 정해두면 달성할 확률은 높아지고 그로 인한 삶은 만족감과 행복감은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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