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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농구화, 나이키 에어포스 쉬어 미드

자식 생각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동일하다.

by 권호원

신발은 사람의 발을 보호해주고, 운동이나 장거리 이동시에 도움을 준다. 헤어스타일, 상하의 스타일링, 더불어 잘 어울리는 신발은 패션의 일부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분위기나 목적에 따라 다른 신발이 사용된다. 트레이닝복에는 운동화, 넥타이를 멘 정장 차림에는 구두, 가까운 거리를 외출할때는 슬리퍼, 수업시간 실내에서는 실내화, 축구 경기에는 축구화, 농구 경기에 적합한 농구화 등 다양한 상황에 걸맞는 신발은 있다.

하계 올림픽에서 아프리카 케냐는 중장거리 달리기 종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냥이나 식수 등을 위해 장거리를 이동해야하는 마사이족들의 타고난 운동능력과 신체구조를 언급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2000년대 초반 그런 마사이 워킹을 표방한 운동화 제작 업체들이 있었다. 신발 아랫창이 평평하지 않고 반달처럼 휘어진 신발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제조사는 뒷꿈치 쪽이 아예없는 신발이 마사이워킹과 가장 흡사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부모님께 어버이날 선물로 바닥이 둥근 신발을 선물해드렸다. 신발 선물의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다. 연인사이에서는 신발을 주고 받는 것은 ‘헤어질수도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서 하지 않아야 할 선물중 하나다. (이런 식으로 증명되지 않는 괴소문은 또 있다. 비오는날 이사하면 잘살아요 - 이 말은 이사짐 회사에서 취소 주문이 들어올까봐 만들어낸 말이다. 머리크면 장군이요, 발이 크면 도둑이다 - 속담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런말도 있다. 또래 비해 발이 길었던 나는 도둑이 되기 정말 싫었다) 부모 자식사이는 연인 관계를 초월한 관계이므로 신발선물을 괜찮다고 믿었다. 그리고, 어릴적 신발을 사달라고 많이 졸랐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께 신발 선물을 꽤 많이 해준 기억이 있다. 가장 비쌌던 신발이 바로 마사이족 워킹을 표방한 신발이었다.

어릴적 운동화는 나에게 늘 골칫거리였다. 헤어스타일과 패션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심지어 3학년 때까지는 동네 친척 할머니가 이발을 해주셨다. (대중이발관과 가동댁 할머니 참고) 그러나, 신발에 대한 관심과 욕망만큼은 남달랐다. 형과 누나가 신는 신발은 궁금했었고, 나도 신발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누나와 형의 신발을 물려받는다는건 있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신는 신발에 대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제나 나의 편인 할머니께 브리핑을 하곤 했다. KBS 3TV (현재의 EBS)에 나오는 만화 캐릭터가 찍힌 운동화는 온 가족이 모인 저녁식사 시간의 주된 소재였다. 실제로 국민학교 2학년때는 아버지가 그 운동화를 사주셨다. 운동화의 바깥쪽 부분에는 야광처럼 빛나는 만화캐릭터가 있었다. 그레이색의 그 운동화가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얼른 학교에 신고 가보고 싶었다. 매일매일 신발을 신고 싶었다. 정말 열심히 그 운동화를 신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KBS 3TV에는 또 다른 캐릭터가 나왔고, 그 사이 나는 키보다 발이 더 빨리자란듯하다. 몇개월이 지나지 않아, 내인생 첫번째 만화 캐릭터 운동화는 시들시들해졌다. 그렇게 좋았던 신발이 마음을 떠나버렸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가 조금 작아진듯했고 만화캐릭터의 인기는 예전같지 않았다. 하루는 미술시간에 칼과 가위를 가지고 종이를 오려 붙이는 시간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바닥에 떨어진 색종이들을 정리하고 집에 가기 전이었다. 불현듯 내 손에는 커트칼이 있었고, 운동화 바깥쪽에 붙어있는 야광처럼 빛나는 만화캐릭터를 손에 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멋진 캐릭터를 발에 양보할 수 없다는 생각과 그냥 오래 신은 신발이니 손좀 봐주고 싶었다. 조심스레 커트칼로 만화 캐릭터를 오려내고 있는데 쉽지 않았다. 만화캐릭터를 뜯어내기는 커녕 멀쩡한 신발에 구멍만 생긴 것이다. 정말로 큰일이 났다. 내가 그렇게 졸라서 산 신발을 내가 망가뜨린 것이다. 오른쪽 발등 바깥쪽이 1cm 가량 예리하게 구멍이 생겼다. 돌부리를 차다가 생긴 구멍이라고 우기기엔 너무 매끄러웠다.

그 시절엔 운동화가 한켤레밖에 없었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고, 그 사이에 흙길도 있었고 운동장에서도 흙놀이를 많이 하던 편이라 매 주말마다 운동화 빨래를 했다. 운동화 빨래는 신발끈을 풀어주기만 하면 어머니가 해주셨다. 그렇지만, 내 잘못으로 인해 운동화가 구멍난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 일이 있은 이후부터 주말엔 내 운동화는 내가 직접 빨래를 했다. 내꺼만 하면 의심받을까 싶어 형이나 누나 신발도 같이 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 형과 누나는 의아했지만 신발을 맡겼고, 그 일이 걸리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칭찬을 받았다. 세켤레 이상의 운동화 빨래를 매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신발끈이 풀려있지만, 밑창을 꺼내 운동화 솔에 빨래비누를 적당히 묻혀서 문질려줘야 한다. 팔도 아프고 귀찮았다. 용케 부모님께 걸리지 않고 한두달이 지났고, 놀랍게도 나는 발이 자라서 그 신발을 꺾어 신게 되었다. 아버지는 신발 꺾어신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셨지만 신발이 작아진 경우라면 지체없이 새로운 신발을 구입해주셨다. 커트칼로 망가뜨린 신발이 작아지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새로운 신발을 살 찬스를 맞이했다. 특히, 주말마다 국민학교 2학년생이 형과 누나의 운동화빨래가지 해줬으니 조금 비싼걸 사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다. 운동화를 사기 위해서는 시장에 갔다. 시장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신발이 있긴 했지만, 브랜드만큼의 다양한 운동화 사이즈는 없었다. 내가 마음에 드는 브랜드나 디자인이 있다면, 사이즈가 없었다. ‘머리크면 장군, 발크면 도둑’이라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말이 왜 있었는지. 이미 245mm를 향해 가고 있었던 3학년인 내가 240mm라는 발 사이즈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말은 '두대왈장군 족대왈적(頭大曰將軍 足大曰賊:머리가 크면 장군이요 발이 크면 도둑이다)'이란 한자성어에서 유래됐는데, 옛날 장군은 투구를 쓰기 때문에 머리가 크다고 하였고, 도둑놈은 도망다니기 때문에 발이 크다고 한 말이다. "도둑은 가리는 데 없이 투자의 목적이나 수익이 분명한 곳은 가리지 않고 다닌다."며 "그래서 어디든 간다는 뜻으로 발이 크다고 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두어달 동안 운동화 빨래를 한 보답으로 얻는 신발이기 때문에 다소 작은 신발이라도 좋은 신발을 사고 싶었다. Hippo라는 브랜드의 깔끔한 흰색 운동화를 골랐다. 발이 몇이냐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두대왈장군 족대왈적’이 떠올리실까봐 그 나이의 평균인 ‘235mm’라고 이야기했다. 갸우뚱하시면서 235mm운동화를 주셨다. 정말 꽉 끼었다. 여유라고는 찾아볼수 없었지만, 마음에 들었고 발이 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족대왈적은 더더욱 있을수 없는 일이다. 신는 순간부터 꽉낀 운동화는 나에게 엄지발가락의 물집과 뒷꿈치의 물집을 안겨주었다. 특히 오른발은 심했다. 사람은 오른발과 왼발이 다르다는 사실과 제조사의 상황에 따라 신발의 크기가 달라질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235mm라고 찍힌 라벨이 조금 다를수 있다는 것이다. 신발 구매당시부터 꽉낀 Hippo운동화, 그 운동화를 신는 동안 내발엔 물집이 없는 날이 없었다. 신기한건 오른발에만 물집이 생겼고 왼발은 괜찮았다. 물집이 있을때는 걸음걸이가 이상하기도 했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다. 그놈의 ‘족대왈적’이 뭐길래. 꽉끼는 운동화였던데다 견고한 앞이었기 때문에 체육시간에 축구 킥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2,3학년 축구에서는 멀리 차면 최고다.) 물집잡히는 신발로 3-4개월간 고생하다 발이 왜그러냐는 아버지의 관심에 적당한 이내 적당한 신발을 구입해주셨다. 그 이후로는 운동화 욕심은 사라졌다. 그냥 사주시는데로 신었다. 하지만, 1년에 한번 정도는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살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원하는 신발은 꼭 사이즈가 없었다. 작은 신발로 인해 물집이 생기길 한두번 더 겪고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때는 정말 신발 욕심을 버리고자 마음먹었다. 운동화가 필요하면 할머니가 가시는 시장에 가서 가장 저렴한 신발을 샀다. 손주가 참 검소하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안동중학교는 하절기에 교복을 입는다. 반팔 셔츠와 회색바지를 입었고 나머지 기간에는 사복을 입었다. 할머니가 시장에서 사주신 검소한 운동화는 사복과 교복 모두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나의 신발에 대한 욕심은 사라진것이 아니었다. 그냥 잠시 잠자고 있었을 뿐.

중학교 2학년에는 농구가 시작됐다. 농구할 때는 농구화가 있어야 했다. 중학교 입학에 맞춰 할머니가 사주신 운동화는 15,000원 가량이었다. 중학교 1학년때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신발에 대한 나의 욕심이 잠에서 깨어난것이다. 모든 친구들이 농구화에 빠져들었다. 농구화는 나이키와 리복이었다.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과 챨스 바클리, 앤퍼니 하더웨이 등을 후원하였고, 시그너쳐 운동화를 제작했다. 마이클 조던의 AIR JORDAN 시리즈는 너무 비쌌다. 챨스 바클리의 AIR MAX역시 만만치 않았다. 앤퍼니 하더웨이는 생소했다. 리복에는 불세출의 샤킬오닐이 있었다. SHAQ시리즈가 나왔다. 인스타 펌프라는 진귀한 충전 시스템 등은 너무 거창했다. 그때 같은 반에 영길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안동 나이키 매장을 운영하시던 분의 조카였다. 삼촌이 나이키 매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나이키 운동화 정보는 물론, 크진 않지만 ‘조카 할인’도 가능했다. 거의 공동구매하다시피한 신발이 바로, ‘에어 포스 쉬어 미드’였다. 검정색이었고, 안감에는 푸른빛이 돌았고, 조던 시리즈의 날렵함과 맥스 시리즈의 에어, 샤크 시리즈의 중후함이 묻어있었다. 모든 것이 만족되었다. 디자인, 성능, 브랜드, 사이즈, 색깔. 그러나 가격이 만족되지 않았다. 42,500원이었다. 사악한 가격이었다. 15,000원짜리 운동화를 신던 내가 갑자기 42,500원을 지출하긴 쉽지 않다. 우선 영길이가 신었다. 또 다른 친구가 신었다. 다음주에 또 다른 친구가 샀다. 5명이 되었다. 얼마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떻하지? 큰일이다. 없어지면 어떻하지? 샀다! 나이키 매장에 여러번 들렀다. 신어봐도 되나요? 재고는 있지요? 제가 275mm인데 작게 나오는건 아니지요? 정말 여러번 다녔다. 그러면서 용돈도 좀 모아보았다. 부모님께 차마 4만원이 넘는 운동화를 사야겠다는 말은 못했다. 3만원 정도라고 거짓말 했고, 나머지는 용돈 탈탈 털어서 갔다. 부모님이 주신 3만원과 이것저것 모은 오천원짜리 천원짜리 그리고 백원짜리까지 총동원했다.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돈을 다 건네주고 에어포스를 건네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안동중학교 학생중에 이 신발을 신은 사람이 10명이 넘었던것 같다.

그 이후에도 몇번의 농구화와 테니스화 (농구화와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저렴한 편) 등을 신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구두를 주로 신다보니, 신발에 대한 욕심은 사라졌지만, 옷이나 시계 이상으로 신발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신발장에 담긴 15켤레 정도되는 신발이면 이제 신발 구매는 10년 이내는 없을듯하다. 사회생활 첫 월급 기념으로 부모님께 신발을 사드린것 같다. 어린시절 나의 욕심을 되갚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에어포스 쉬어 미드를 사면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신발 선물을 자주 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회생활의 햇수가 늘어나고 당시 어버이날은 ‘마사이워킹화’가 눈에 들었다. 큰 수술을 하셨던 아버지의 산책과 운동을 위해서 걷기 편한 운동화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뜻밖의 성과급 덕분에 주저하지 않고 매장으로 갔다. 마사이 워킹화 가운데 가장 비싸다는 신발은 생각보다 비쌌다. 예상보다 두배가량이었고, 아버지는 사드리고 어머니는 안 살수 없기 때문에 예상액보다 4배가 들었다. 요즘 다시 검색해보니 마사이워킹화는 그 당시 가격의 1/4로 떨어져 있었다. 회사 경영상의 문제와 법률적인 문제로 경영진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젠 관심없다.

자신있게 보내드린 신발 선물에 대해 아버지께선 ‘잘받았다’고 짧게 말씀하셨다. 그런가보다 하면서 시간이 지났다. 어버이날이 한참지나고 부모님 댁에 갔는데, 이게 왠걸 아버지 신발이 없어졌다. 평소 신문이나 종이 박스 같은걸 잘 버리지 않으시는 아버지를 잘 알기에 신발 상자를 열어봤더니 없었다. 설마하는 마음에 신발장,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아버지께 직접 여쭙기가 뭣해서 어머니께 물어봤더니, 미안해서 말을 못했다고 하셨다. 내가 사드린 신발을 작은 아버지께 드렸다고 했다. 정말 깜짝놀랐다. 왜이리 놀라냐는 어머니는 가격을 물어보셨다. 그냥 보통~ 이라고 짧게 말씀드렸더니, 그럼 다행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도 막내 아들이 준 신발을 동생(나의 삼촌이자 작은아버지)에게 주는건 안될것 같다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호원이는 이해할것이다’면서 주셨다고 했다.

아버지 어린시절, 작은 아버지는 하나뿐인 동생이었고,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장 역할을 했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러번 말씀하셨고 여러가지로 짐작이 가능하다. 그 시절은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었는데, 큰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그나마 물려받은 신발로 겨울을 보냈는데, 작은 아버지는 물려받는 신발이나 양말이 전부였다. 많은 형제가 있던 것이 아니었고 가난한 상황에서 상태가 괜찮은 것이 물려줄리 만무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하루는 동생이 발을 절뚝절뚝 거리길래 봤더니,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군용 워커를 신고 다니시던 작은 아버지의 발이 온통 동상에 걸려 빨갛게 변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슬펐다고, 동생의 발가락이 변변치 않은 양말과 신발로 인해 동상에 걸렸다는 것이다. 가장이자 형이었던 아버지로서는 매우 슬펐을 것이다. 내가 어버이날 즈음 선물을 보내드렸는데, 그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 제사가 있어 서울에서 작은 아버지가 오셨는데, 당신의 어린시절 그 생각이 났고, 제사에 참석하신 작은 아버지 신발도 변변치 않아 보여 내가 보내준 신발을 드렸다고 하셨다. 아버지 제사에 모인 형제가 신발이야기를 하면서 신발 선물을 한 것이다. 끝으로 나에게 ‘신발이 좀 작았다’고 하셨다.

어릴적 나는 멋져보이는 신발을 신으려고 부모님을 졸랐다. 정확한 사이즈를 얘기하지 않아 내 신발은 나의 발을 괴롭혔다.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의 신발 사이즈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 내가 선물한 신발이 작은 아버지에게 전달되었다.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 조금 있었던 오해는 말끔히 사라졌다.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새로운 신발을 사달라고 졸랐던 막내 아들을 위해서 당신이 신으시던 신발보다 훨씬 비싼 신발을 사주신 부모님이셨다. 신발 빨래는 내가 했지만, 말리는 건 늘 아버지셨다. 신발을 말릴때 가장 좋은건 태양광이지만, 태양광이 여의치 않으면 아궁이 앞이나 솥뚜껑위에 올려두면 한나절이면 바짝 마른다. 운동화에 1cm정도의 예리한 칼날 흔적을 부모님께서 몰라봤을리 만무하다. 나이키 운동화가 3만원이라는 것을 부모님께서 모를리 없다. 그냥 믿어주신 것이다. 어쩌면 속아주신 것이고, 기를 살려주려 이해해준 것이다. 늘 그렇게 부모님은 내편이셨다. 그런 부모님이 감사하고 고맙다. 나도 그런 부모가 될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존경하는 부모님이었다. 사춘기 때는 때때로 ‘부모님보다는 더 잘 살거야’라고 다짐했지만, 철이 들고 나서는 ‘부모님 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철이 들지 않았지만, 신발만 보면 문득문득 부모님 생각이 난다. 나도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자.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다’는 말을 부모로서 나의 부모님과 감히 비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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