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삶의 윤활유가 된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취미를 찾아라.
인터넷 검색창에 ‘취미와 특기’를 검색해봤다. 내가 원하는 결과는 취미와 특기의 사전적 의미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화면에는 ‘면접에서 쓸만한 이력서 취미 특기’, ‘이력서에 쓰기 좋은 직무별 취미&특기’, ‘자기 소개서에 취미&특기 적는 법’, ‘이력서, 취미와 특기로 관심을 끌자’, ‘이력서 자기 소개서 취미와 특기 합격 향한 작성법’ 등이 가득하다. 마치 취미와 특기가 이력서, 합격이 아니면 설자리가 없어보일 지경이다. 취미와 특기 그리고 이력서, 합격이 교집합에 부분집합이 돼 버렸다.
검색결과 ‘표준국어대사전 :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일,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고려대 한국어 사전 :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서 즐겨 하는 일, 감흥을 느끼어 마음에 일어나는 멋’, ‘우리말 샘 :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이라고 정의했다. (사전 :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서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 최근에는 콤팩트디스크 따위와 같이 종이가 아닌 저장 매체에 내용을 담아서 만들기도 한다) 나는 사전에서 단어 찾는 취미도 있었다. 가운데 방이 책방이었는데, 그곳이 곧 놀이터였다. 정확히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그 방에서 노는 것이 더 편했다. 놀때는 즐겁거나 편하거나 두가지중 하나가 완벽히 충족되면 그만이다. 친구들과 노는건 즐거웠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하고, 흙이라도 묻으면 옷을 털고, 보란듯이 세수를 해야했다. 가운데 방에 드러누워 시간을 보내면 그럴 옷을 털거나, 저녁 먹기전 세수 이외 추가 세수가 필요없다. 방에는 사전이 많았다. 책장 아랫쪽에는 ‘백과사전’이 있었는데, 3학년이 되기전까지는 백과사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거운 책이자 무서운 책이었고, 이상한 책이었다. 1권부터 30여권이 나란이 진열돼 있었다. 1권의 겉표지엔 ‘한국표준대백과 사전’이라고 큼직한 글씨가 세로로 써있었다. 그리고 1권, 그리고 그 아래엔 ‘ㄱ~고트발트’였다. 2권은 ‘고트실크~극상’, 3권은 ‘극성물군계~노섬브리아’ 등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수 없었다. 무서웠다. 뭔가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무서운 내용이 있는줄 알았다. 거의 매일 중간방에서 뒹궁뒹굴하면서, 백과사전의 세로 제목과 눈을 마주쳤다. 책장은 내 키보다 훌쩍 높았지만, 백과사전은 가장 아래쪽에 진열돼 있었다. 22권 즈음에서 아는 단어가 생겼다. ‘아시아’였던것 같다. 3학년때 일이다. 뭘까? 왜 그동안 내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이내 용기를 내 22권을 꺼냈다. 30여권의 사전마다 커버가 있었다. 커버를 벗기니, 새것이었다. 그렇다. 아버지도 백과사전을 활용하지 않으셨고, 누나와 형도 백과사전을 꺼내보질 않았던 것이다. 북커버에서 매끄럽게 빠져나온 백과사전을 넘기니 정말 놀라운 신세계였다. 없는게 없었고 사진까지 있었다. 아시아로 시작된 22권에서도 내가 아는 것이라곤 많지 않았다. 옆에 있는 20권, 24권, 아시아,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을 찾기 시작했다. 사진이 있어 너무 좋았다. 글씨는 너무 작았지만 사진이 있는 것들을 찾아서 읽다보니 재밌고 우스꽝스런 사진도 많았다. 혼자 키득키득 거리면서 백과사전이랑 재밌게 놀았다.
백과사전을 접하면서, ‘정의’하는 버릇이 생겼다. 공부할때도 그렇고,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다툼이나 언쟁이 생겼을 때도 말꼬리 잡는 버릇이 돼버렸다. 아주 고약한 버릇이다. 학교에서 친구랑 말다툼이 벌어졌다. ‘내가 그걸 하건 말건 이건 내 ‘자유’야.’라고 주장하는 친구에게 ‘너는 자유의 정의도 모르는구나. 자유는 나 혼자만 편한게 아니라,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는거야. 니가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야~’라고 해버렸다. 5학년때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포함된 무리가 축구를 하는데 다른 축구 무리들이 몰려들어서, 본인들도 축구를 해야겠다고 주장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 친구에게 통쾌하게 ‘자유의 정의’에 대해서 한방 먹이고 나서, 단어에 대한 정의, 상대 말실수에 대한 그 상대방의 정의, 그에 따른 선입견, 그리고 나만의 고집이 복합되면서 나는 핑계를 대는 버릇이 생겼다. 나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질 경우,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때마다 상황의 반전을 위한 ‘핑계거리’를 찾았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상대방도 잘못한 것이 있으니 나의 잘못과 너의 잘못이 비슷비슷하니 서로 그만합시다, 혹은 당신도 잘못한게 있는걸 인정해주세요~ 라는 논리인셈이다. 잘못을 저지른 범죄인이 변호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던지, 사건의 본질을 다른 것으로 돌려버리는 변호인의 모습을 상상하면 편하다. 사춘기 시절, 내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내가 얄미웠고, 그 이후로 백과사전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영어 단어의 뜻이 기억나지 않을때 필요한 ‘영한 사전’이나, ‘영어식 사고를 위한 영영사전’, ‘영영사전이 너무 어려워 사용한 영영한 사전’이 고작이었다. 분명 중학교때가지는 가방속에 커다란 백과사전이 하나씩 있었다. 그냥 펼쳐놓고 한장씩 넘기는 취미가 있었다. 백과사전의 다음 자리에 바로 영한사전이 차지했다.
나는 글쓰기 취미가 있다. 글쓰는데 취미가 있다. 좋은 글을 보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외우려고 노력한다. 지금은 ‘글쓰기 노트’와 ‘읽은 글 담기 노트’, ‘독서 노트’를 항상 휴대한다. 스마트폰과 테블릿 PC를 통해 신문을 읽는다. 눈이 침침하고 눈물이 나지만, 편하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신문을 읽는다. 유치원때부터 읽던 종이신문 역시 아직도 읽는다. 유치원때는 아버지가 정기구독을 해주셨다. 나를 배려해서 어린이 신문을 구독하진 않았다.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 참조) 25살 직장생활 처음부터 신문을 읽었다. 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있고, 17년이 지난 지금도 신문은 정기구독중이다. 정기구독 신문 덕분에 스마트폰과 테블릿에서 지문 신문을 무료로 읽을수 있다. 고집스럽게 신문구독을 이어가고 있다. 종이 신문 구독도 나의 취미인 셈이다. 하지만 신문을 읽는건 글쓰기 취미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인데, 기자들의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특히, 주제어를 꺼내는 방식이나 인용하는 책, 사건, 인물 등은 아주 가끔이지만 기자들에 대한 존경심마저 들때가 있다. 짧은 글에서 얻어지는 ‘좋은 글’은 나의 글쓰기 취미에 보탬이 돼준다. 글쓰기 취미를 위해 신문을 읽는 취미가 생겼고, 덕분에 17년 연속 자동이체를 하다보니 굉장히 저렴한 비용으로 신문을 받아보고 있다. 너무나 오랜기간 자동이체를 했기 때문에 얼마인지도 모른체 지나가다가 최근에서야 알았다. 자전거가 필요해서 혹시나 ‘자전거 주는 이벤트 없나요?’라고 물어봤더니, ‘지금 현재 고객님은 xxxx원으로 구독중이신데, 본인이 경험해본 사람중에 이렇게 저렴하게 신문 구독을 하시는 분은 못 봤어요~’
책읽기 취미도 있다. 어린시절 책을 가까이 하긴 했지만, ‘완독’이 목표였으므로, 완독하지 못했던 내 모습에 많이 실망했다. 그래서 다 읽을 수 있을 책만 골라잡는 버릇이 생겼다. 책을 읽을 때는 아랫쪽이나 윗쪽에 나와있는 책 페이지수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요즘엔 전자책(e-book)을 즐기는 편인데, 진도율(%)에 집착하는 편이다. 서점에서 산 책을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가 책상 한 쪽에 고이 놓는다. 놓여 있는 책만 봐도 뿌듯하다. 읽지는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점에 가서 새로운 책을 또 만지작거린다. ‘저번 책도 읽어야 하는데…’ 싶다가도, 어느새 책을 사서 지난번 놓아둔 책 위에 새로 산 책을 쌓는다. 그렇게 읽지 않은 책은 쌓여만 간다. 전문가들은 ‘츤도쿠’라고 한다. 츤도쿠(積ん読)는 ‘책을 사는 것은 좋아하지만 쌓아 두고 결코 읽지는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다. ‘읽다’란 뜻의 일본어 ‘도쿠(読)’와 ‘쌓다’란 의미의 ‘츠무(積む)’에서 파생된 ‘츤(積)’이 합쳐져 ‘읽을거리를 쌓아 둔다’는 의미가 됐다. 츤도쿠는 책을 사고 읽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갈 때, 우리는 영화를 시청할 시간도 같이 구매한다. 웹툰의 미리보기를 결제할 때, 보통 우리는 구매후 곧바로 웹툰을 본다. 즉, 영화관에서 영화예매와 웹툰의 미리보기를 구매할 때 우리는 구매할 컨텐츠와 구매할 시간을 같이 구매한다. 반면 도서 구매는 어떠한가? 환타지 소설, 만화책, 교과서 참고서 등을 구매하면 바로 컨텐츠를 소비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300페이지가 넘는 경제, 경영, 인문학, 심리학, 정치학 도서나, 시리즈 도서를 구매했다면, 곧바로 시작하여 완독까지 이어가는 경우는 적다. 제목이 마음에 들거나, 추천, 주변 지인의 평가에 의해 구매하지만, 도서를 구매할 때 ‘읽을 시간’을 감안하지 않았던 나의 ‘급한 성격’ 때문에 완독이 어려웠다. 츤도쿠 문제 이외에 ‘호킹 지수’도 문제가 있다. ‘호킹지수’(Hawking Index)는, 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 팔린 스티븐 호킹의 명저 ‘시간의 역사’는 실제로는 1000명 중 66명만이 완독을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말이다. 수학자 조던 엘런버그는 2014년 한 칼럼에서 아마존 킨들을 이용해 조사한 ‘완독률’을 소개하며 호킹지수란 말을 붙였다. 그가 소개한 역대 가장 낮은 완독률을 기록한 베스트셀러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으로 호킹지수가 2.4%에 불과했다. (2019년 8월 1일 매일경제, 김슬기 기자, ‘호킹,시간의 역사 천만부 팔렸지만…끝까지 읽는 책은 따로 있었네’ 기사 내용 일부 발췌)
가난했던 대학시절엔 도서관을 적극 이용했다. 하지만, 나의 호킹지수는 30% 이내였다.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신문의 자동이체가 큰 부담이 없어진 이후 ‘츤도쿠 현상’이 늘었다. 더불어, 내가 산 책이었지만 여전히 호킹지수는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의 취미는 ‘책읽기’이다.
취미로 몇가지가 더 있다. 자전거 타기도 좋아했다. 또래에 비해 늦은 나이인 4학년이 돼서야 두발 자전거를 탔다. 작은 사고 한두번이 있지만 아직까지 매우 안전하게 자전거를 즐기고 있다. 달리기도 좋아한다. 또래 비해 다소 키가 큰 편이어서 4학년때부터는 육상부였다. (아버지 말씀을 빌리자면) 그늘에서 자란 콩나물처럼 키만 자란 나였기 때문에 단거리 종목보다는 ‘높이뛰기나 던지기, 오래달리기’ 종목을 맡았다. 오래달리기를 잘하진 못했지만, 단거리 선수가 되지 못해 장거리 선수가 되었다. 다들 하고 싶어하던 100미터, 200미터 선수는 달리기가 가장 빠른 친구들의 몫이다. 밀리고 밀려, 가장 하기 싫어하는 오래달리기 종목 ‘선수’가 됐다. 운동장을 하염없이 달리거나, 한바퀴는 달리고, 한바퀴는 걷는 훈련이 너무너무 싫었지만, 훈련 이후 제공되는 ‘우유와 빵’은 너무나 달콤했고, 훈련의 고통을 이겨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 육상부를 비롯한 운동부 자체가 인식이 좋지 않았다. 책읽는 것이 우선이고, 차라리 농사를 짓던가, 그도 어렵다면 물건을 만드는건데, 공장다니는거 보다 못한것이 장사하는 것이다. 내 머리속에 자리잡은 사농공상이고 내가 느낀 유교의 고정관념이다. 학생이 운동을 하는것보다 수업을 열심히 들어야 하는것이 우선이고, 부모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운동을 하면 공부를 못하니, 운동부(체육부) 하라고 하면 ‘안한다, 못한다, 하지 말라 그랬다’는 가르침을 알려주셨다. 운동부는 체벌이 심할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운동하는 모습이 힘들어보였다. 하기 싫은 운동을 하는 것같았다. 축구부가 있던 학교였는데, 한여름 뙤약볕에서 엎드려 뻗쳐있거나, 원산폭격(머리박고 열중쉬어) 자세로 기합받는 선배 동기 후배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축구부에 비해 육상부는 달리기 못한다고 때리거나, 수업시간을 단축시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역으로 체계적이지 않고 내적 소질보다는 키와 몸무게 등 외적 소질만으로 선수 선발을 했던 셈이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도 훈련을 했다.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잠깐이었지만, 육상부의 기억은 말그대로 ‘선수’로 남아있다. 그래서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선수때도 기록이나 성적은 별로였다. 운동을 해봤다는 기억은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시절은 ‘사춘기’ 관점으로만 본다면, 3가지 부류로 나뉜다. 사춘기 ‘전, 중, 후’였다. 신체적으로는 ‘후’에 가깝지만, 남학생들이다보니 ‘중’인 경우가 많다. ‘사춘기 중’인 친구들은 감성적인 친구들이 많고, ‘사춘기 후’인 친구들은 이성적인 편이다. 취미에 대한 이야기도 확연히 다르다. 취미에 관해 ‘전’인 친구들은 ‘취미는 고르는 대상’이었다. ‘중’인 친구들은 정해진 취미에 열심이다. ‘후’인 친구들은 취미에 이은 특기에 관심을 갖는다. 고등학교 3년을 보내면서 ‘취미’의 범위를 정하고, 참여를 해보고, 특기로 만드는 과정의 ‘시작, 참여, 실패’를 여러번 경험했다.
사춘기 ‘전’ 단계에 사전읽기, 글쓰기, 책읽기, 자전거, 달리기’ 정도로는 부족하다. 노래하기, 그림그리기를 추가하고 싶었다. 그 때는 왜그리 시간이 많았던지, 늘 고민은 ‘이따 뭐하지?’ 였다. 학교에서 공부하기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시간이 얼마나 잘 갈까?’, ‘그림을 잘 그리면 얼마나 좋을까? 내 얼굴을 직접 그릴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그릴수도 있으니 시간도 잘 가겠지?’ 그림을 잘 그리는 상헌이에게 초상화를 요청한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못생긴 내 얼굴을 그려준 상헌이였지만 너무 멋져보였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리냐라는 물음에 ‘그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아지를 그려보라고 했다. 머리부터 그렸다. 강아지 옆모습을 2차원적으로 그렸다. 코, 눈, 귀, 발, 어깨, 꼬리에 신경을 쓰면서 그렸지만 ‘너무 어린이 그림’이었다. ‘니가 한번 그려봐!’라고 하는 순간 슥삭슥삭. 강아지 정면을 그렸다. 상헌이가 그린 강아지 얼굴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연습의 결과인가? 타고난 것인가?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이었다. 그 때 상헌이도 ‘사춘기 중’이었다. 경문이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잘 했다. 즐거워보였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이내 노래가사를 옮겨적는다. 그리고 다른 노래를 듣는다. 자율학습 내내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음악을 듣는 모습이 즐거워보였고, 왠지 멋져 보였다. ‘나도 노래를 듣고 싶은데, 노래를 잘 하고 싶은데, 노래를 잘하면 얼마나 시간이 잘 갈까?’ 그러나,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노래를 듣거나 흥얼거린다면 ‘집중해야할 공부의 방해요소’였으므로 철절히 외면했다. 방송반 규창이는 음악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다.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대중음악, POP음악, rock 음악, 헤비메탈 음악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다. 가수와 앨범, 곡 정보까지 술술 꿰차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배철수의 음악캠프? GMV잡지? 콘서트? TV?’ 인터넷이 없던 시절 정보의 정확성과 적시성, 다양성은 제한적이다. 동네형에게 들은 이야기, 그러면 그 동네형은? 다른 선배한테 들은 이야기, 그러면? 규창이의 음악 지식 원천에 대해 역학조사를 이어간다면 최초 발원지를 알아내는 건 크게 어렵지 않던 시절이었다. 반면 최근에는 ‘스마트폰이나 테블릿, 개인용PC’라는 매체를 통한 정보의 방향성은 실로 놀랍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나 취미로 하고 있는 것들의 시작이 어디인지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주는 상황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최초’는 어디일까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불가능해졌다. 내가 바로 ‘성지’가 되는 것이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상황이 돼 버렸다.
최근 ‘요가, 명상’등 정적인 취미에도 관심이 많다.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릴만큼, 무언가 ‘해야’하는 취미에서, ‘가만히 있는’ 취미들도 다양해졌다. 취미는 삶의 활력소가 된다. 윤활유가 된다. 꽉 짜인 일정만으로 일상을 이어가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기차 블록 놀이, 그 기차가 커브길을 문제없이 지나가려면 기차가 너무 길어선 안된다. 너무 자주는 아니지만, 중간중간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연결고리에는 짐을 싣기도 어렵고, 승객이 탈수도 없다. 그렇지만, 커브길을 유연하게 지나가기 위해서 그것이 없다면 기차는 직선주행밖엔 불가능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생’이라는 직업이 있지만,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그 시기이다. 취업을 위한, 대화를 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취미’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잘하지 못하더라도 삶의 윤활유가 될만한 취미는 몇가지 가진다면 삶은 더 윤택해진다. 휘발유와 경유는 연료가 되지만, 윤활유는 연료가 되진 않는다. 연료가 되지 못하는 윤활유는 녹이 슬지 않게 해주고, 차를 반짝반짝 빛나게 해준다. 삶의 윤활유가 되는 다양한 취미를 가져보자.
시간이 지나면서,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후회’가 찾아올 때가 있다. 가끔 가게되는 수영장이나 물놀이 시설에서 가장 아쉬운건 ‘수영’이다. 수영은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한번 배워두면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차는 있지만, 수영을 배우는데 시간이 걸린다. 아직도 해보고 싶은 취미 가운데 한가지를 꼽는다면 수영이다. 피아노, 기타처럼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배우고 싶다. 내 얼굴을 그리거나, 가족의 모습을 그려줄 수 있는 미술, 공연장에서 즉흥적으로 춤을 출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실력과 용기를 배우고 싶다. 겨울에는 스키장에서 멋진 활강을 하는 스키도 배우고 싶다. 내가 필요한 기능을 갖춘 ‘앱’을 찾아다니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기능을 담은 ‘앱’을 만드는 것도 희망사항이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라고 하지만,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에 갔을 때 일본어나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나열하고 정리하는 것은 아마 평생 숙제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