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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Apr 30. 2019

산업화 시대의 야수, 모더니즘의 사생아.

<셰임(Sham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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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란 장르의 매력은 은유도 직유도, 그리고 원관념의 직접적인 제시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점이다. 허공에 떠 있는 어떤 관념을 붙잡으려 좇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엔진이 폭주하고 폭발이 난무하는 시각적인 영화도 있다. 이것과 저것이 같은 영화라는 예술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항상 나를 즐겁게 한다. 우스갯소리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세상을 영화로 배웠다고 말하곤 하는데, 반쯤은 정말 진심이다. 모든 영화는 나의 발화의 기초가 되는, 나의 모든 언어와 생각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경험의 넉넉잡아 반절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항상 매사에 감정적이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셰임>은 그런 맥락에서 퍽 새로운 영화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어떤 관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 실체가 너무도 뚜렷해서 마치 실제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감정을 슬픔, 외로움, 고독 따위의 두루뭉술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치환하기에는 조금 더 구체적이다. 굳이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채워질 수 없는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는 끝없는 욕구'라고 해보고 싶다. 그러나 이 감정은 이런 조잡한 단어로 설명하기보다는 포스터를 보면 훨씬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시작 장면이기도 한, 웃통을 벗은 채로 '이 감정'을 잔뜩 담고 있는 표정을 한 마이클 패스벤더의 모습은, 이 영화가 어떤 느낌을 하고 있을지 아주 간단하게 예측하게 해준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포스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마이클 패스벤더라는 배우의 능력이 존경스럽다. 원래 배우란 이런 걸 하는 사람이다. 단순한 인물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말이나 글, 혹은 다른 어떤 것들로도 표현해내지 못하는 무언가를 자신의 육체로 표현해내는 예술가. 그러나 만족스럽게 해내는 이들은 드물고, 그렇기 때문에 마이클 패스벤더와 같은 훌륭한 배우들은 소중하다.


2


 하루에도 만 번씩 마음을 스쳐지나가는 여러 감정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소중하다. 그러나 그 감정이 모두 오밀조밀하고 예쁜 것만은 아닐테다. 증오와 분노, 시기와 질투처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을 띠는 것들이 즐비하고, 오히려 비율로 따지면 부정적인 감정의 쪽이 훨씬 많을 때가 많다. 감정이 소중하다는 대전제는 이러한 부분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다. 가치판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끓어오르는 모든 감정을 가감없이 합했을 때에야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긍정적인 감정은 소중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모두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우리를 영원히 어떤 수준에 머무르게 만들고,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만든다. <인사이드 아웃>이 노래하는 것처럼.


 <셰임>의 브랜든은 분명 어딘가 고장난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를 견인하는 감정은 조금 비약해 단 두가지밖에 없다. 공허함과, 죄책감이다.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섹스에 집착하고, 자신의 그런 모습에 끝도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의 발현은 동생인 씨씨를 통해 구체화된다.  자신의 빈 마음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로써의 사랑을 줄 수 있는 브랜든의 유일한 존재인 동생밖에 없고, 이미 브랜든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해 공허함과 죄책감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무너뜨리고 죄책감에 빠지게 될까 두려워하여 그녀를 자꾸만 밀어내게 된다. 그의 이런 회피는 결국 동생의 자살이라는 사건을 촉발시키고야 만다. 죄책감을 회피하다가 더 큰 죄책감을 마주하는 악순환에 빠지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사건을 겪었을 때면, 우리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말하자면 반면교사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었거나, 혹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도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관객은 감히 예측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든의 마지막은 이전까지의 그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고장난 집착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금 핥는 듯한 시선을 길가의 여자에게 보내는 그의 모습은,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에 관객마저 동참시킨다.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을 더 이상 나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하는 주된 동력으로 삼지 않기 위한 지난한 투쟁의 과정에 자신을 억지로라도 불러오게 만드는 첫 번째 관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은 물론 중요하지만 어쩌면 대다수의 가치에 대해 우리는 이미 충분히 합의를 이룬, 납득할만한 판단을 가지고 있다. 나의 행동에 대해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다만 그것을 인지했을 때 스스로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끊어낼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브랜든은 스스로의 감정을 외면해버렸으며, 이 과정에 실패하여 썩어 곪아터진 존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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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어떤 것들이 브랜든을 이런 존재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유효해 보인다. 브랜든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 뉴욕이라는 거대하고 삭막한 도시의 부품에 불과하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땅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무생물적인 존재일 따름인 것이다. 인간성이 배제된 이 땅에는 그러므로 지금까지 인간이 이룩했던 모든 윤리와 가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것은 새로운 수준의 홉스적 자연 상태나 다름없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는 모든 것에 앞서 스스로의 생존을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삼게 만든다. 현대의 뉴욕에서 '생존의 문제'는 더 이상 나의 심장을 날붙이로 꿰뚫을 누군가에 대한 고민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공고한 사회의 가치에서 철저히 유리되는 것으로 인해 숨을 막히게 만드는 소외의 문제에 가깝다. 여기서 나의 생동하는 감정을 붙들고 있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도시의 가치는 감정이 배제된 체로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기계화된 삶을 살아가기에는 그는 여전히 인간이고,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욕구에서 눈을 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브랜든의 섹스 중독은 실존의 문제로 승화된다. 관념적인 수준에서 나의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다면 약동하는 육체의 움직임을 통해 나의 생존을 증명해내야만 한다. 육체에 느껴지는 쾌감과 내뱉는 거친 숨소리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만드는 일시적 해결책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당장 나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 이 순간에는 윤리적인 가치는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윤리란 인간 사회가 인간적인 모습을 할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살아있음을 증명해야만 하는 브랜든의 투쟁은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인간성마저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고, 야수적인 존재로 격하시킨다. 먹고, 입고, 잠들 곳을 찾아 헤메는 과거의 야수가 아닌 무감각한 사회에서 무언가 느끼고 싶어하는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의 야수, 모더니즘의 사생아. 모두들 웃고 있지만 여기 웃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울고 있지만 여기 울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텅 빈 나무통들이 흔들리며 부딪히고 텅- 하는 공허한 울림만 반복될 뿐이다. 



4


 감독이 생각하는 '현대 사회'는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항상 주지해야 할 점은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닌 누군가의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브랜든이라는 인물은 뉴욕에 살고 있는 개인을 표상한다. 어쩌면 뉴욕을 넘어선 현대의 도시를 살아가는 누군가이기도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개인에 대한 일차원적인 가치판단은 물론 중요하지만 이런 이야기에 이르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마치 하나의 윤리적 실험실을 마련해 그 곳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감독이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극도로 심화시킨 어떤 이의 초상이다.


 그러므로 브랜든은 나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브랜든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셰임>을 감상할 자격을 비로소 손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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