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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Mar 20. 2019

스스로 일구어낸 온전한 가족의 형상.

<바그다드 카페(Bagdad Cafe), 1987>


 가족과 원만히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제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게 해내는데 실패하곤 한다. 나의 선택과는 별개로 태어나서 십수년 간 그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게 불가피하다면 되도록 잘 지내면 좋으련만 그 과정은 왜 이리도 어려운 걸까. 다행히도 나는 특별히 복잡하지 않은 가정사와 사랑이 넘치는 집안을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하곤 한다. 가장 기초적인 사회 생활이자 처음 만나는 인간관계인 그들과 나는 언제쯤 편한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엄마랑 아빠를 사랑하긴 한다. 당연히 동생도. 사이도 꽤 좋다. 


 가족이 있는 집이 가장 편안한 장소로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나는 그게 대부분의 우리에게 환상에 불과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떠올리곤 한다. 물론 그들과 만나면 편안하다고 느끼기야 하지만 아주 긴 시간 동안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당신은 가족과 친구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묻는다면, 나는 솔직히 그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다. 가족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쁜 사람인걸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괜찮지만 엄마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망할 표정을 보고 싶지는 않다. 그럴 일이 없어서 다행일 따름이다. 


 결국 우리 모두가 타인에 불과하단 사실이 맹점이리라. 엄마와 아빠와 동생과 나는 그렇게나 많이 외적으로 내적으로 닮아있음에도 어차피 타인에 불과하다. 세상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연속이며, 내가 아닌 이상 전부 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역을 남이 아닌 '나'의 영역으로 잘못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내가 그들에게, 혹은 그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때 이건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사이가 벌어지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다. 물론 그러고나서도 아침에 조금 째려보면서 밥 한 끼 먹으면 저녁에는 또 괜찮아지는게 가족이긴 하지만서도. 


 더불어 그 선택의 과정이 온전히 우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나이가 들어 나의 선택으로 가족을 꾸리게 된다면, 그 때야 나와 충분히 닮아 있는 사람을 고르는 거니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투고 싸우다가 헤어지는 결말을 맞곤 하지 않는가.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가족도 그럴진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주어진 가족과 가까워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하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결국 가족이라는 의미가 마음을 놓고 가장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위해선,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적 통념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구성하고야 만 결혼이라는 선택지보다 훨씬 더 큰 의미로, 나는 내 자신의 선택으로 가장 낮고 기본적인 수준의 공동체인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산다. 언제 만나도 따뜻하게 나를 반겨주고, 함께 있으면 즐거워지는데다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그런 이상의 가족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아득한 상상에서 시작하여 만들어진 것만 같은 영화들이 있고, <바그다드 카페>는 그 중 하나이다. 




 따뜻한 영화를 싫어하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향이 있던데 이 기회를 빌어 항변하자면 나는 세상 따뜻한 사람이다. 나처럼 따뜻한 사람을 몇 번 만난 적이 없다. 다만 내가 따뜻한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대자면, 수십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따뜻한 영화는 대부분 유치한 영화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보이지만 비단 한국 영화 뿐 아닌 다른 나라의 영화들도 이른바 '가족 영화'로 포장하여 단순한 수준의 플롯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연령대가 낮은 이들마저도 포용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변명하고 싶겠지만 당신도 나도 그게 헛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보는데도 그렇게나 마음에 와닿았던 <겨울 왕국>이나 <인사이드 아웃>을 기억한다. 물론 너무 유명세를 탄 탓에 그 본질이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밝고 긍정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유치하지 않을 수는 없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종종 나타나곤 하는 이런 영화들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대책없이 이상적이고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으로 용인이 되는가는 감독이 얼마나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가 하는 역량의 문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인 <7번방의 선물>에서 열기구를 타고 날아가는 장면이 영화적으로 따뜻한 감성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과연 용인받을 수 있을까. 영화적 세계 안에서조차 수렴하지 못하고 비논리적인 씬은 아무리 감성적일지언정 억지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못하다. 


 <바그다드 카페>의 이야기는 어쩜 모난 구석이 한 개도 없다. 이렇게나 구김살이 없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랑을 듬뿍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스필버그의 <터미널>의 그것과 비슷한데, 그 영화가 일종의 '스필버그 스타일'로 무난하게 접근했다면, 이 영화는 훨씬 영화적이고 세련된 감성을 지니고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도 이야기 한 바 있지만, 갈등을 배제하고, 혹은 갈등을 빠르게 해결해버리고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며 갈등을 만들고 그걸 해소하는 순간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 과정에서 생긴 관객과 인물의 유대감을 통해 갈등 이후에도 영화의 텐션을 계속 유지시키는 게 이야기 전개의 정석인데, 갈등을 빨리 해소시켜버린다면 인물과 유대감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채로 그들이 휘적거리며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데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아 재미가 없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 단계를 '야스민'이라는 유니크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건너뛰고자 하고, 거기에 충분히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녀가 스크린을 휘젓고 다니는 데 입가에 미소를 짓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두 주인공 여성은 각자 자신의 남편과 방금 결별한 참이다. 상실의 역사를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와중에, 제대로 된 건물 몇 채 서있지도 않는 사막 한가운데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건 비극이나 다름없다. 으레 우리는 하나의 관계를 끝내고 나면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사고와 날카로운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고, 그 무렵에 만난 인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와 가장 빠르고 깊게 친해질 수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갑자기 텅 비어버린 마음을 확 채우는 것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지만. 헤어지고 난 다음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었다가 후회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테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처음에는 삐걱대던 두 여성은 쉽게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는 못하지만 곧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서로를 애틋해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젖어들어가는 이 순간이 마냥 부럽고 사랑스럽다. 


 독일 백인 여성과 미국인 흑인 여성이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들의 주위에는 가족으로 거듭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흑인과 백인, 히스패닉, 아메리칸 인디언을 비롯하여, 방금 태어난 아기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길가의 모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이들이지만 이들은 서로를 가족처럼 사랑한다. 이들은 가족으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비로소 가족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그 비밀은 무엇일까. 정말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단어'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타인의 낯선 냄새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 그건 역시 사랑밖에 없다. 마지막 장면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막무가내같은 사랑의 힘이 새삼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야스민이 이 데면데면한 공동체에 녹아들어 이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던 계기는 마술이었고, 야스민이 잠시 그들의 곁을 떠났을 때 그들이 그녀를 부른 대명사 또한 'Magic'이었다. 야스민은 바라만 보아도 사랑스럽고, 헌신적이고 구김살이 없는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그녀 또한 자신의 남편과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녀의 남편에게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이들을 만나고 나서는 마법 같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삶에는 가끔 마법같은 인연이 찾아오곤 한다. 그러나 그 마법을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나만, 나에게만 마법같은 나의 야스민. 그 혹은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꼭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오늘도 너를 만나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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