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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Jun 24. 2019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신성(神聖).

<테이크 쉘터(Take Shelter), 2011>

1


 노아는 산 위에 방주를 만들었다. 모두에게 쏟아지는 미친 사람이라는 조롱에도 노아는 굴하지 않고 계속 방주를 만들었다. 이윽고 대홍수가 시작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모두 노아의 방주로 달려갔지만 문은 이미 굳게 닫혔고 그 곳에 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내러티브의 원전이 된 성경의 일화들 중에서도, 누구나 알 법한 이야기를 꼽자면 순위권 안에 꼭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파급력이 큰 이야기이니만큼 종말에 관한 이야기라면 대부분 조금씩 이 이야기에 빚을 지고 있으며, 지금 다룰 영화 <테이크 쉘터> 또한 노아의 이야기에서 일정 부분 모티프를 차용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으레 다른 종말을 다룬 영화가 그렇듯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는 아니다. 지구 전체를 부술 커다란 대재앙보다는 주인공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 정도에게만 영향을 미칠 비교적 스케일이 작은 허리케인에 대한 영화이며, 영화 내내 진짜 허리케인은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고 하늘만 조금 어두워지고 비나 좀 올 뿐이다.


 이제 재앙은 세계가 아닌 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과거 인류 전체, 혹은 어떤 공동체의 단위로 우리의 세계를 규정하던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진행하며 급격한 개인화의 바람과 함께, 세계의 모습을 내가 소속된 어떤 사회가 아닌 개인의 내면으로 축소시키게 되었다. 페스트와 천연두 대신 등장한 새로운 전염병인 우울증, 강박증, 불안장애 따위의 정신 질환들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의 종말은 그러므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외부 세계가 아닌 개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작고 사소하지만 내부로부터 천천히 우리를 좀먹어 완벽한 파괴의 길로 이끄는, 더 흉악하고 잔인한 모습이 되어.



2


 이 영화의 주인공인 커티스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는 친절하고 상냥한 신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전지하고 전능하여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신은 부재하고, 그 존재를 대체하는 것이라곤 반복되는 악몽에서 비롯된 끝없는 불안감과, 언젠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종말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뿐이다.


 노아가 모두의 손가락질에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근거는 자신을 언젠가 구원해줄 신의 존재였다. 아무리 극한의 상황이라도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의지할 신이라곤 전혀 없는 커티스에게 의지할 것이라곤 언젠가 정말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종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재앙이지만 동시에 구원이기도 하다. 자신조차 계속해 의심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언젠가 정말 허리케인이 몰려온다는 믿음만이 자신의 정신 나간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파괴적인 아이러니라니. 


 현대의 신은 어쩌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신 대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파멸에 대한 공포다. 내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이윽고 어떤 재앙이 나를 덮쳐 파멸시킬 것이라는 공포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이유가 된다. 이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단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표상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해줄 전능자에 대한 기약 없는 믿음 대신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불안함과 공포를 믿기로 결정한다.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 이 사회에서 우리가 완전한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아무리 개인화된 사회에서도 결국 타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신념을 타인에게 증명하는 순간, 몰려오는 허리케인의 모습을 나와 내 아내의 눈으로 확인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그 처절한 믿음이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순간이다. 봐, 모두가 죽어 사라지겠지만, 결국 내 말이 맞았어. 봤지?



3


 방공호라는 제재는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사면이 콘크리트로 막힌 방공호는 마치 초기 인류가 만들었던 것처럼 투박하고 원시적이다. 몰려오는 종말에서 살아남기 위한 장소가 필요최소한의 생존 도구만 남겨놓은 그 작은 공간이라는 연출은 이토록 진일보한 문명을 만들어낸 인류를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가 문명화되기 전 인류의 상태는 그야말로 야수적인,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언급한 그 유명한 말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였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사회라는 테두리를 만들었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타인은 주로 커티스와 그 가족들을 해칠 괴물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꿈속에서 창문을 깨고 이들을 위협하더니, 나중에 이르러서는 실제적으로 커티스에게 상해를 입히기도 한다. 물론 그 이유가 커티스가 먼저 그의 생계를 위협했다는 사실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커티스에게 있어서는 그의 존재는 자신을 위협할 타인인 것이다.


 근대화를 거쳐 고도로 발전한 문명은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편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혼자 힘으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우리는 혼자서도 어떤 것이라도 해낼 수 있다. 타인의 존재는 내가 이룩한 것들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잠재적 적일 뿐이다. 바야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의 귀환인 것이다. 인류의 진보는 우리를 다시 한 바퀴 돌려 원시 상태로 만들고야 말았다.


 그런 우리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라곤, 원시적인 모습을 한 절대 뚫을 수 없는 견고하고 딱딱한 콘크리트 덩어리 뿐이다. 이것은 자신을 덮칠 자연 재해에 대한 방어이면서, 동시에 종말이 다가왔을 때 방주에 아무도 들이지 않기 위한 타인에 대한 방어책이기도 하다.



4


 커티스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언젠가 어떤 사건이 일어나 나와 내 가족들을 집어삼켜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 또한 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항상 불안에 시달리며 산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불안에 떨어보지 않은 인물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합격, 취업, 저금, 결혼, 육아, 노후 따위의 불안정한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 연인, 가족과의 인간관계와 날 항상 괴롭히는 통장 잔고, 내 학점,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건강 문제라던가, 이렇게 길게 보지 않더라도 당장 내일 입을 것 없는데 뭐 입지, 밥은 뭘 먹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누굴 만나지, 하는 수많은 걱정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또한 불안함은 쉽게 전염된다. 아무 걱정 없이 있다가도 불안해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괜히 아무 생각 없던 나까지 불안해지고, 그게 나와도 관련 있는 일이라는 걸 들으면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느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비록 결말은 그런 식으로 끝났지만, 엔딩 시퀀스를 들어내고 바로 그 전 시퀀스에서 영화가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공호에서 부들대며 떨고 있던 커티스에게 사만다는 이제 괜찮을 거라며 방공호 밖으로 나가자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방공호 밖으로 나가자 작은 허리케인이 지나가 조금 피해를 입혔을 뿐, 파랗고 청명한 하늘이 그들을 반겨준다. <테이크 쉘터>의 이야기는 원래대로의 결말로 끝나는 편이 훨씬 영화적으로 완성도가 높겠지만, 사실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불안함에 있어 대부분의 결론은 오히려 이 장면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함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잠깐 지나갈 산들바람에 불과한 것인데 나 혼자 착각해서 태풍일 거라고 벌벌 떠는 것이다. 물론 그런 태도는 지극히 당연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짜 태풍일 수도 있는 노릇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나는 바람의 대부분은 땅을 갈아 엎고 우리의 집을 뿌리째 뽑기보다는 잘 매만져놓은 머리를 망치는 수준밖에는 되질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의 미친 소리를 경청해주고 괜찮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있다. 혼자 생각할 때는 불안해 죽겠지만 그 누군가에게 털어 놓고 이야기하면 사실은 별 것 아니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기도 한다. 어차피 해결될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이 되지 않을 일은 걱정해도 아무 소용 없지 않은가. 가끔은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이 모든 일의 해결책이 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 태풍은 온다. 우리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커다란 허리케인은 반드시 온다. 그 때를 대비해 방공호를 파놓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대부분의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주지만, 부정적인 삶의 태도는 나의 삶이 끝나는 순간을 막아줄 수 있다는 걸, 언제나 마음 속에 새기고 살아야만 하겠다. 뭐, 아니면 다행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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