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엔의 사랑(百円の恋),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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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나라를 떠올릴 때의 이미지는 그 복잡하고도 기괴한 면을 가진 국가의 특성 상 수십 가지가 있겠지만, 요즈음의 일본 사회를 떠올릴 때는 항상 깊은 무기력에 젖은 군중의 표정 없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런 이미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한 최근의 기억은 <오, 루시>의 오프닝 씬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통근 시간의 군중은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듯 마스크를 끼고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생각과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미세먼지가 그렇게 기승을 부린다고 난리를 피워도 좀처럼 마스크를 쓰지 않는 우리나라의 국민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같은 맥락으로 일본 사회의 무기력은 한국의 그것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 또한 무기력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국가 통수권자의 타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그 시작이 되었다는 분석을 필두로 여러 가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중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인지는 더 지켜보아야 할 문제겠지만. 어쨌든, 그렇기 때문인지 우리의 무기력의 기저에는 깊은 분노가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조롱과 저항으로 이를 이겨내려는 시도가 관찰되는 것과는 달리, 일본의 무기력은 '권위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라는 그들의 국민성에서 비롯되어 훨씬 순수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무기력에서 우리의 모습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만, 이에 수반하는 논리 구조나 행동 따위가 좀처럼 납득하기 힘든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일테다.
적어도 양복을 입은 회사원이라면 생계를 위한 수단 정도는 이미 마련되었으니 무기력함에 대항할 수 있는 가능성 정도는 가지고 있지만, 일명 '프리터 족'이 대변하는 저소득층 서민들의 삶은 아득히 막막하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품지 못하는 이들을 마주하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드는지, <백엔의 사랑>이 그리고 있는 이들의 초상이다. 어느 순간부터 믿기지 않는 수치인 대졸 취업률 98%를 자랑하며 한국의 청년들에게 일본 취업은 마치 신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실제 일본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고들 한다. 그러므로 이 수치는 두 가지를 나타내고 있는데, 첫째는 98%의 아성이 허구에 기반하여 세워졌다는 합리적 의심이고, 둘째는 '일하지 않아도 굶어죽지 않는 부자 국가'의 모순이다. 어째서 이들은 행복하지 않은가. 그들의 불행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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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이 되어도 집에서 일하지 않고 빈둥댈 수 있다는 것은 부모가 아무리 작은 도시락 가게를 하고 있을지라도 한 명의 성인 정도는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작은 영세 가게가 생활고에 허덕이며 자살을 시도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모습이 우리보다 나은가 하면 우열을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오히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관찰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 즉 중산층의 삶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숨을 걸고 노력해야만 중산층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어찌나 어려운지, 심지어 우리는 그렇게 되었을 때 행복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얻을 수 있다고 (혹은 그럴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고) 착각하기까지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자유와 방종은 오랜 세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했다. 당연히 그렇다고 '헝그리 정신'을 역설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테지만 괜히 한 번 더 밝혀두고 싶다.
삶은 복잡하다. 복잡하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너무 복잡한 나머지 삶이 복잡하다고 할 때는 복잡이라는 말을 두 번 써서 삶은 복잡복잡하다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분명 나에게만 삶이 복잡한 건 아니겠지. 길거리에 지나가는 어느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해주리라 감히 확신할 수 있다. 이건 참인 명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어떤 상황에서나 성립하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걸 개인의 가난함과 부유함의 정도 따위로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를테면 부자의 대명사로 널리 쓰이는 '만수르'의 삶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삶에 주어진 모든 문제는 과연 그의 마르지 않는 재력으로 해결할 수 있을 수도 있겠다만, 그의 삶이 정말로 복잡하지 않다고 당신은 단정할 수 있는가. 차원은 다르겠지만 그의 삶이 우리의 것보다 훨씬 복잡하지 않을까? (물론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복잡함은 어려움을 수반하고, 어려움은 힘듦으로 귀결된다. 누구에게나 삶은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상술한 조건들에서 내가 도출해낸 결론은 답지 않게 희망적인데, 어차피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 상황에서나 힘들 거라면 굳이 힘든 데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내가 힘든 이유는 이것 때문이고, 저것 때문이고, 과연 그것만 해결되면 행복의 나라로 하얗고 커다란 백조를 타고 훨훨 날아갈 것처럼 구는 것은 어쩌면 멍청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게 아니라 삶은 원래 힘들다. 원래 힘든 거고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이라면 굳이 불평불만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쪽이 편하다. 혹은 유일한 대안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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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희망적인 결론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주로 희망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경험에 의거한 논리에서 비롯된다. 뭐가 그렇게 잘 되고 잘 풀리겠어. 나의 삶은 매일이 실패로 가득 차 있고, 당장 주머니에 있는 이어폰조차 풀기 어려울 정도로 잔뜩 꼬여있는걸. 에어팟 살 돈으로는 치킨을 시켰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희망적인 메세지 자체를 싫어하는 부정적인 사람인가 하면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영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말 같은 가짜 희망이 아니고, 모든 게 실패한 끔찍한 상황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품을 수 있는 작은 새싹같은 희망이라면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 영화의 결론이 좋은 이유기도 하다. 으레 일본 영화들이 교훈적인 메세지를 품고 있는 데 비해 이 영화는 조금 다른 방식의 교훈을 주기로 결정한다. 삶은 여전히 어렵고 아주 작은 성공마저 여전히 아득하게 멀리 있지만,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잿더미를 파헤쳐 무언가를 찾아내려 하는 노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럴 것이다. 내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할지언정 뿌듯히 숨이 차게 달려보았다는 경험은 언제나 나에게 자양분으로 남을 것이고, 길고 긴 여정 중에 언젠가 빛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약 없는 약속에 인생을 거는 건, 멍청할지언정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