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대도시의 거짓말쟁이들.

<사랑에 빠진 것처럼(Like Someone in Love), 2012>

1


 영화를 고르다보면 마치 한 끼 식사를 같이 할 상대를 고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적당한 식당에서, 적당한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서, 차려진 음식을 즐기며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어떨 땐 깊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이야기를 하다가 슬퍼져서 눈물이 날 때도 있고, 분노할 때도 있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릴 때도 있다. 어떤 상대냐에 따라 그 날의 식사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이야기를 항상 듣기만 해야 한다는게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가 한 편 끝나면 이제 식사를 마치고 헤어져야 한다. 만약 또 만나고 싶다면 그 영화를 다시 보면 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도, 다시 만나면 새로운 느낌이 든다.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이 보일 때도 있고, 다른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만났을 때 든 인상은 '이상하다.'였다. 이름을 들었을 때는 으레 만나는 평범한 로맨스와 크게 다른 점이 없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세련되고 어른스러운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하고 있어 괴리감이 든다. 살짝 긴장하고 자리에 앉으니 이번엔 또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정하게 말을 건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해지려고 할 무렵에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무표정한 모습을 보인다. 방금 전까지 웃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그 인상에는 지레 겁을 먹었다. 그치만 내내 은은하게 풍기는 묘한 분위기가 '아 나는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확신을 들게 한다.


 영화의 감독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 출신 감독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도쿄에서, 일본 배우들과 함께, 일본어를 사용해서 찍은 영화다. 그러면 우리는 이 영화를 이란 영화라고 불러야 할까, 혹은 일본 영화라고 불러야 할까. 영화가 속한 국가를 규정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나 기묘한 정체성은 영화의 분위기를 좀처럼 한 두가지 단어로는 규정할 수 없도록 흐릿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포스터는 어떤가. 어두운 도시의 네온사인이 비쳐 보이는 차창 안에서,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허공으로 시선을 흩뿌리고 있다. 이미지만 주목한다면 로맨스라기보다는 공포 영화의 결을 오히려 닮아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영화의 제목도 그렇다. 첫인상은 여타 다른 로맨스 영화와 크게 다를 점이 없다고 느꼈는데, 곱씹을수록 묘한 부분이 있다. 사랑에 빠진 것 '처럼' 이라니. 사랑에 빠진 거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하필 '처럼'이 붙어야 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X처럼, 이라고 말할 때는, 사실은 X가 아닌데 X인 흉내를 내고 있다거나, 혹은 X와 많이 닮았다는 숨겨진 뜻을 담는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랑에 빠지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2


 내내 묘하고 수상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영화는, 도무지 하나도 확실한 게 없다. 너무 많은 것들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채 지나가버린다. 이를테면 아키코가 그 날 밤 타카시와 잤는지, 타카시가 아키코에게 품는 감정에 정확히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왜 하필 타카시가 아키코를 지명했는지, 아키코가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데 얽힌 사연은 무엇인지, 따위를 포함하여 너무 많은 것들이 미궁 속에 갇혀 있다.


 물론 모든 영화가 모든 장면을 설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이야기를 풀어내야하니만큼, 어떤 것들은 생략하고, 어떤 것들은 영화 외적으로 감독이 직접 밝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그런 것들의 설명을 포기하는 이유는 더 중요한 것들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핵심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아무리 짧게라도 설명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는 조금 비약해 그 어떤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사건이 일어나는 그 순간을 지켜볼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지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극중에서도 이 정보의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아키코는 타카시에게 노리아키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묻지만, 타카시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할 뿐, 어떤 해답도 주질 않는다.


 카페에 앉아있다 보면 의도치 않게 주변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처럼 될 때가 있다. 가만히 있어도 대화가 들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내막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들이 나누는 대화만을 듣고 있자면 우리는 그 뒤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상상해서 덧붙여야만 한다. 대화의 당사자들은 이미 서로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넘어가는, 이를테면 '전남친'이라던가, '크리스마스 날'이라던가, 그들은 그것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단어를 꺼냈을 때 그들의 태도를 통해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테다.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이나, 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 같은 영화들은 이런 단편적인 정보만 제시하는 대표적인 영화들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언급한 영화들처럼 호기심에서 비롯한 상상력으로 뒷이야기를 덧붙이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극이 흘러가면서 밝혀지는 사실에 따라, 우리는 이 영화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거짓말이라고 의심하게 된다. 거짓말과 애매모호함을 기반으로 하는 대화는 인물간의 관계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자극적이고 특별한 사건이 없이 대화만 할 뿐인데, 우리는 이들 간의 관계에서 이유모를 스산함을 느낀다. 타카시가 아키코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아키코가 더 이상의 질문을 멈춘 것처럼,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는 더 이상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영화에게 궁금해하지 않게 된다. 대화에 있어 혹시 이 이야기가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더 이상의 정보는 필요하지 않다. 거짓말인지, 거짓말이 아닌지만 중요해진다. 지금까지 들은 정보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순식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다음 단계는 뻔하다.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하고, 정체가 들킬 까봐 전전긍긍하는 아키코의 불안함은 쉽게 관객에게까지 전염되어 서스펜스를 형성한다.



3


 영화의 등장인물 세 명은 모두 서로에게 퍽 열심이다. 타카시가 아키코에게 들이는 공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노리아키도 아키코와 결혼하기 위해 나름의 진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거짓말의 원인인 아키코 또한 누굴 대하든 대하는 그 순간은 진심이다. 타카시에게, 노리아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순간의 아키코는 최선을 다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정말 사랑한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를 향하는 단어들이 진심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선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랑'은 상대방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모든 단어들은 '난 너를 사랑해.'라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이들의 사랑은 스스로를 향하고 있다. 그 외침이 그토록 공허하고 거짓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그 외침이 '난 나를 사랑해.', '그러니 너도 나를 사랑해줘.'라는 속내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결국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인 고독이다. 고독을 해결하는 모범 답안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다. 더 이상 혼자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고독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전과도 같은 만남은 이들을 절박하게 만든다. 상대방을 부둥켜 안으며 사랑을 고백해보지만, 이미 마음 속에 삐죽삐죽 솟아난 고독은 상대방의 심장을, 또 제 자신의 심장을 찢고 쑤시며 상처입히기만 한다. 애초에 고독한 두 타인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채워 하나가 될 수 없다. 단지 고독한 사람 두 명이 될 뿐이다.


 이들이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새로운 사람이 아니다. 도쿄의 타인은 나의 고독을 해결할 수 없다. 진짜 고독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이를테면 멀고 먼 타향 도쿄까지 자신을 만나러 늙은 몸을 이끌고 찾아온 아키코의 할머니에게, 그는 뛰어갔어야만 했다.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나의 모습은 이렇게 볼품없으니까. 그리곤 의미없는 기대를 걸고 밖으로 나선다. 저 바깥에는 나의 고독을 해결해줄 누군가가 있을거야. 분명 한 명은 있을거야. 도쿄의, 서울의 밤에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이전 14화 패배자는 죽어야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