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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활기찬 청춘이 멸종한 사회에서.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夜明け告げるルーのうた),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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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종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성도를 어느 정도 갖춘 일본 장편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꼬리표는, 일본 내에서도, 국내 홍보용으로도 이래저래 남용되고 있다. 이 용어 자체를 처음 등장하게 만든 '호소다 마모루'부터 시작해 '신카이 마코토', '오시이 마모루', '하라 케이이치' 등의 작품에도, 말하자면 지브리의 '적통' 후계자인 '미야자키 고로', 故 '곤도 요시후미',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등의 작품에는 마치 오피셜인 양,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는 미야자키의 저주는 좀처럼 끊일 예정이 없어 보인다. 물론 이 수식어를 자칭하는 감독은 하나도 없다. 애초에 가장 적실한 후계자라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여기고 있는 호소다 마모루부터 이 수식어가 불편하다고 몇 차례나 밝힌 바 있다. 하기야, 자기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영화 감독 중에서 포스트 누구누구의 칭호를 자칭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게 아무리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칭호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끝없는 은퇴 번복과, 지브리의 후계자 양성 실패로 인해 꽤 오래 전부터 꾸준히 등장해왔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는 찾을 수도, 찾을 필요도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직 '진짜' 마지막 작품을 남겨놓고 있기도 하고, 그의 공고한 작품세계는 여러 의미로 고고한 성 같은 불가침영역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감독 유아사 마사아키의 작품을 언급할 때도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의 저주는 슬금슬금 덮쳐오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아사 마사아키를 언급할 때는 곤 사토시의 이야기가 먼저 나와야 하는 쪽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작품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냄새가 풍기는 지점은 오로지 일본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는 점밖에는 없다.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끼친 무궁무진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스릴러는 히치콕의 유산이다. 음, 그건 맞긴 하지만.


 어쨌든 결론은 그에게 이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이 수식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측면의 이득은 가져갈 수 있지 않나 싶다. 장편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영화와 동일 선상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애니는 애니고 영화는 영화라는 식의 태도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역대 최고의 영화 순위 중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렇듯 애니메이션이라는 스스로의 한계를 깨부수고,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훨씬 넓힐 수 있는 무기로 스스로의 속성을 이용할 가능성에 대해서, 그런 맥락에서 '포스트~'를 운운한다면, 그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일본의 신예 애니메이션 감독은 아마 유아사 마사아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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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개봉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두 작품을 연달아 보고서 가장 먼저 인지할 수 있는 유아사 마사아키의 특징은 작화가 굉장히 화려하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어떻게든 실제 세계를 모방하는 방향으로, 그러나 거기에 그림을 그린 사람의 아이덴티티와 세계에서 할 수 없는 물리적인 제약을 조금 벗어나는, 그러나 영화 안의 세계에서의 물리법칙에는 배치되지 않는 상상력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그의 영화는 세계가 가진 모양은 빌려오되 모방이 아니라 창조의 개념에 가깝다. 굳이 주목하지 않아도 될 지점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점 두개와 동그라미 한개를 대충 찍어놓은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나, 흐릿하게 느낌만 주고 싶은 사물의 경우 색을 가진 뭉텅이로 그려버리는 그림은 세계보다는 꿈의 모양을 닮아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꿈을 꿀 때, 내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녹아내리듯 간신히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시선을 돌려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형태를 가진다. 그가 꾸는 꿈은 나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러한 작화가 대충 그리는 것과 가지는 차이는 의도된 점이라는 것이다.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마치 추상화를 감상할 때 물질의 형태 정도만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지만, 전체 그림을 놓고 보았을 때 사실은 완벽한 구도와 형태를 지니고 있는 점과 비슷하다. 인어가 등장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우리 세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그들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인어의 마법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그들의 세계는 충분히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크게 무리가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이 모든 부분이 철저하게 계산된 지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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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있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일본스럽다'는 지점이리라. 여기서 말하는 일본스러움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인데, 이를테면 여자아이의 팬티를 보는 것이나, 전혀 매력이 없는 남자라도 고백을 하면 여자가 설레하는 것이나, 어떤 커다란 결정을 하는 동인이 너무 사소한 고백에 있는 것이나, 여성의 신체 부위가 과도하게 드러나는 것이나, 성추행이 확실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헤헤 웃으며 넘기는 것 등등이 일종의 문화처럼 여겨지는 부분이다. 최근의 이슈와 맞물려 이런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나아가 일본의 여권 향상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이 세계 무대에서 꾸준히 수요를 가지는 이유는 이른바 '야마토 나데시코' 따위의 구시대적 유물이 적어도 남성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유효한 성적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 개인이 순종적인 여성상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문화화되고, 사회의 대다수의 여성에게 그러한 모습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너무 많이 발전되고야 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몽둥이를 들고 당장 깨부숴야 하는 악습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고한 사실이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가 가지는 의의 중 하나는 이런 불편한 요소들이 상당히 제거되었다는 데 있다. 물론 같은 문화권에서 성장한 이들의 이야기인만큼 아직도 한계점이 충분히 보이기는 하지만,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이야기의 모든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는 지난 애니메이션들에 비해서 이 영화의 캐릭터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모에'로 대표되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스토리라인을 제공할 수 있다는 건 애니메이션으로써 장족의 발전을 했음을 의미한다. <너의 이름은>이 보였던 분명한 한계와는 또 다른 지점이다.


 또한 이런 모습 이외에도 캐릭터를 상당히 입체적으로 쓰고 있다는 지점이 고무적이다.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들이 새롭고 신선한 세계를 구상하는 데에만 힘을 쏟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전히 평면적이라는 지점에서 한계를 가졌다면, 이 작품의 이야기는 오히려 비교적 평범하지만 캐릭터들은 살아 숨쉰다. 뚜렷한 선과 악의 구분을 타파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노후화되는 마을, 그곳에 사는 소년의 꿈, 전통과 개혁, 폐쇄된 커뮤니티의 배척과 수용 등 우리의 세계와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들을 다루는 데에서 비롯되는 살아 있는 캐릭터들의 고뇌는 놀랍도록 생생하다. 하나의 인간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 개의 키워드로 분류될 수 있었던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을 넘어서, 비로소 하나의 '인간'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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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은 이 이야기를 쓰면서 무기력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고 했다. 요즈음의 청춘이 한 치 앞길도 모르고 방황하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과거의 소년소녀들이 그랬던 것과 달리 우리 세대의 아이들은 무기력으로 가득 차 있어 보인다. 아직 세계에 자신이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에는 뛰어들어 개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지만,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는 지금의 공고한 세계에서는 작은 아이들이 무언가 새롭게 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이미 존재하는 전철을 따라가는 데 불과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정해진 규칙대로, 왕도를 따라서 걷는 것으로 인생을 소비해야만 한다는 것은 무기력감을 증폭시키기만 한다. 도전하는 청춘은 이미 모두 성공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영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카이가 음악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 그것을 해결해준 존재는 비현실적 존재의 마법같은 능력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루의 목소리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카이는 루와 함께라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마치 갑자기 신이 등장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해결 방식은 이야기가 진행될 때 가장 지양해야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의 마법같은 목소리와 능력은 카이에게 다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은 제공했을지언정, 그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루가 등장한 것이 카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나의 무기력한 일상을 타파해줄 구세주적 존재로써가 아니라, 인간사의 자유로운 마주침 가운데 우연히 조우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주체일 따름이다. 그걸 보고 다시 힘을 얻은 건 카이 스스로의 몫이었다. 영감을 얻었을 때 그것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도 스스로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니 결국 감독이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주 조금의 바람이 불면 다시금 앞으로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는 청춘의 가능성이 아닐까. 이런 이야기라면 뿌듯하게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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