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기행, 2014>
1
영화 속 세계는 자로 잰 것처럼 딱딱 떨어지곤 하는데, 나의 세계는 좀처럼 맞아떨어지는 게 하나 없다. 24시간이 모자라도록 풍성하게 채워지는 그들의 하루를 보다가 나의 오늘을 돌이켜보면 한 것도 없는데 시간만 잔뜩 흘러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가. 두 끼의 밥을 먹고, 한 번의 낮잠을 자고, 멍하니 있던 시간이 나머지다. 벌써 언제 이렇게 밤이 되었네. 이렇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또 일 년이 지난다. 그렇게 의미없이 쌓아온 나날들은 이제 나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은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형, 이제 얼굴에 늙은 티가 좀 나네.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나갈 것인가는 나의 평생의 숙제다. 폭풍같았던 한 학기를 끝내고 능동적으로 무기력하기로 마음먹었던 연초에야 덜어내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지만, 한가한 방학 생활도 이제 한 달 즈음 지나니 지루하기 마련이다. 다시 무언가를 채워나가야만 할 것이다. 누구를 만날까, 무엇을 배울까, 어디로 향할까, 어떤 것을 쓸까.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은 공들여 찾을 필요도 없이 잔뜩 쌓여 있지만 막상 손을 대자니 막막하고 귀찮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침대에 눕곤 한다. 좀 더 자자. 좀 더 쉬자. 잠언에 보면 이런 나를 위한 구절이 등장한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 24:33-34) 알겠는데, 오늘은 너무 귀찮아요. 하루만 봐주세요.
곰곰이 다시 고민해보면 그렇게도 길었던 나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웠는지가 궁금해진다. 무엇으로 채워야할지는 알겠지만,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무엇으로 채워졌는가. 꼬리를 물고 떠오르던 수많은 생각들이 대부분인가 싶다가도, 생각해보니 가만히 있을 때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그러니 그 수많은 시간들을 채운 걸 생각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에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감정이었다. 오늘의 기분, 오늘의 감정, 나의 하루를 좌지우지하던 그 많은 슬픔과 기쁨, 분노, 흥분, 무기력, 그리움, 공포... 그 외에 아직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꼽아 만 가지의 또 다른 감정들.
흘러가는 대부분의 시간들은 나의 감정에 기반하여 규정된다. 하루의 대부분을 채우는 감정들에 대해 찬찬히 고민하는 것은 그러므로 언제나 유의미한 일이다. 스스로를 자아를 확립하는 데 있어 나의 감정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는 건 즐겁고 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세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에덴 동산에 있던 아담이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고, 비로소 완성된 세계로 거듭났던 것처럼 말이다. 나의 세계가 완성되기 위해 알아야 할 나도 모르는 나의 감정들이 아직 마음 속 깊은 곳에 산재한다.
2
요즈음의 영화를 지켜보자면 다들 이래저래 바빠 보인다. 뭐가 그렇게 할 일들이 많은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는 건 즐겁지만 때때로 피곤하다. 아마 현대의 관객들이 영화라는 대중예술에 원하는 것이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순간의 폭발적인 감정인 탓일 테다. 아드레날린으로 대표되는 어떤 속도감에 기반하는 영화는 극장의 개봉관을 지배하곤 한다. 나도 그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그렇다면야, 나는 아마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등장하는 어떤 영화들이 있다. 이래저래 바쁘게 분주하지 않아도, 주어진 러닝타임을 빼곡히 채우는 사건의 나열이 없어도, 흘러가는대로 흘러가는 영화들이다. <철원기행>도 그렇다. 이 영화에 주어진 스토리라인을 보자. 고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의 정년퇴임날, 오랜만에 가족이 다같이 모여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이혼을 입에 올린다. 마침 눈이 내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 모두 막히고, 철원의 아버지 집에서 가족들은 불편한 며칠간의 동거를 시작한다. 이야기라곤 이게 다다. 만약 스릴러 영화였다면 지금까지의 배경을 20분 정도의 초반 시퀀스에 빨리 소개하고, 거기에서 좀비가 등장한다던가, 살인자가 등장한다던가, 가족의 안위를 위협하는 어떤 존재를 등장하게 하는 것으로 극의 텐션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부차적인 이야기들도 조금 진행되는가 싶지만 넌지시 제시되는 정도로 끝나고, 나머지 모든 시간은 이러한 배경 가운데 행동하는 인물들의 감정이 부딪히는 화학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상당히 심심한 영화다.
이러한 영화들이 마주하는 가장 흔한 함정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요리를 할 때도 자극적인 맛보다 심심한 맛의 요리가 만들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최소한의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갈 때, 관객이 이탈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적정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그 미묘한 지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철원기행> 또한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피곤한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간 중간에 스르륵 잠에 들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단점들을 모두 안고서도 이런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오로지 형언할 수 없는 그 미묘한 감정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다. 한국에 태어나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경험해본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이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들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차마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가 겪어본 이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 그 때 우리가 느낀 감정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추상적이고 형태를 갖지 않은 이러한 것들을 스크린 위에 다시 재현하고 생각할 거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3
성인이 되고 가장 기본적인 사회의 단위었던 가족에서 벗어나 거대한 사회에 편입되고 나면, 가족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어렸을 때 나에게는 그들이 세계의 전부였지만, 더 이상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후에야 일 년에 한번이나 마주치면 다행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를 나의 삶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다. 마치 내 몸에 새긴 문신처럼 영원히 남아 있다. 한 번 상처입히면 다시 아물 시간도 없이 다시금 서로의 사회로 나아가야 할 이들과의 관계는 그러므로 항상 조심스럽고, 그들은 언제나 우리의 자랑이자 수치로 남는다.
오랜만에 모인 <철원기행>의 가족들에게는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조차 불편하다. 한 지붕 아래서 같이 밥을 나눠먹고 살아 식구라고 불리는 이들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렸을까. 아버지는 말이 없고, 어머니는 화가 나 있다. 장남은 관심이 없고, 차남은 말이 너무 많다. 동서남북 네 방향처럼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은 이들을 한데 모으고자 하는 건 후에 편입되어 온 며느리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계속 겉돌기만 할 뿐 좀처럼 도움이 되질 않아 보인다.
그런 이들에게 아버지의 청천벽력같은 충격발언은 오히려 잠잠했던 이들의 관계를 휘젓는 동력이 된다. 어차피 이미 다 갈라설 대로 갈라선 관계면서, 왜 하필 지금 와서 이혼을 하려 드는 걸까. 지금 이대로 그냥 사시면 안되나요? 하는 아들의 물음은 여전히 이기적이다. 가족의 안위에 가장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야말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응당 가져야 할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가치에 가장 목말랐던 탓이다. 가족의 이름을 칭호나 직위 쯤으로 여기는 다른 구성원들에게 아버지의 행동은 이해가 갈 리가 없다. 미리 말을 해줬으면 좋았을 걸, 하는 어머니의 분노는 그러므로 거짓말이다.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발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았을 뿐, 아버지는 아마도 끊임없이 표출해댔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절박하게.
보일러가 고장난 상황에서는 이들의 이러한 역할구분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야 할 것으로 기대받는 장남은, 고장난 보일러 하나 고치지 못해 우당탕탕 요란하게 소리만 낼 뿐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작은 열풍기를 켜놓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뿐이다. 진작에 서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함께하지 않기로 선택한 이들이지만 필요에 의해서는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도 전혀 무리가 없다. 어쨌든 오늘 밤만 나면 되니까.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있을 수 있는 건 항상 뒤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아버지의 존재다. 전날 밤 그렇게 술에 취했던 당신은 누구 하나 눈을 뜨기 전에 먼저 일어나 보일러를 고쳐내고, 가족들을 먹일 아침밥을 만든다. 자신들의 무책임함이 사실은 아버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죽을 때까지 모를 가족들은 아침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잘대며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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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사랑이 남아있는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렇기 때문이다. 이혼을 결심한 아버지도, 저주를 퍼붓는 어머니도,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자식들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 아버지를 귀찮게 구는 청년회장인지 뭔지가 거슬리게 하면 일어서서 큰 소리를 내는 아들들이나, 사진 찍는 걸 그렇게도 귀찮아하며 궁시렁거리면서도 머리를 만지작대며 정돈하는 부모님이나, 사실은 서로 아직 많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관계는 그러므로 사랑에 기반한다. 시작한 것도, 끝을 내고 싶은 것도, 여전히 마무리가 되지 않은 채로도 잘 가라며 배웅하는 따뜻한 눈빛과 손짓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아쉽고, 더 어려웠던 것이다.
이들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가족이란 배에 이미 탄 이상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그들은 영원한 우리의 아픈 손가락이다. 죽는 날까지 그리워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