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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일상 속의 비일상, 비일상 속의 일상.

<인 디 아일(In den Gangen), 2018>

1


 우리의 생활에 너무 깊게 파고들어 있어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생각해보면 대형 마트는 참 비일상적인 공간이다. 옆으로 넓은 직육면체 모양의 거대한 상자같은 외관도 그렇고, 높게 솟아 있는 천장과,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어도 끝이 없는 넓이, 없는 걸 찾는 게 빠를 정도로 갖가지 물건을 갖춘 데다가, 똑같은 물건이 몇십 몇백 개나 늘어져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이유 모를 소름이 돋기도 한다. 돈이라는 절대가치만 가지고 온다면 여기 있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단지 물건을 파는 상점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그렇게 가고싶어 하는 건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비일상의 경험이기 때문일테다. 마트는 그런 의미에서 테마파크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마트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 건 상술한 모든 장점을 끌고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 평범한 장소에서 '영화적'임을 갖추어야 하는데, 큰 노력을 하지 않고도 '영화적'인 느낌을 가져올 수 있는 비일상적이고 기묘한 장소인 마트는 좋은 로케이션이 되어 준다. <인 디 아일>은 마트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제목에서 말하는 '아일'은 진열대와 진열대 사이 통로인데, 이 곳을 포함하여 카메라는 마트의 구석구석을 비추며 장소의 존재감을 백분 활용한다. 마치 마트가 또 다른 한 명의 등장인물이라도 되는 것 같은 태도다.


 그 중에서도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통로의 존재가 흥미롭다. 통로란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장소가 아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까지의 중간 지점을 의미하고, 주인공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바로 그곳이다. 이런 설정은 이들이 어딘가의 중간 단계, 혹은 완결성을 갖지 못하고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은유한다. 또한 통로와 통로 사이는 진열대로 막혀 있어 넘어갈 수 없지만 사이로 보이는 상대방과 교류를 한다는 점이나, 통로를 다닐 수 있는 지게차를 운전할 줄 알아야만 한 명의 정식 직원으로 인정받아야만 할 수 있다는 점은, 나름의 해석을 붙여볼 수 있겠으나 그 자체로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영화를 보며 자신만의 생각과 해석을 붙이기 좋은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은 항상 즐겁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


 마트가 우리 대부분의 일상과는 조금 괴리감을 가지는 비일상적 장소라고 언급한 바 있지만,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는 그 비일상이 다시 일상이 된다. 특히 크리스티안에게는 매일 가는 장소를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상'으로 다가온다. 영화 중간에서 우리는 크리스티안이 마트에 일을 하러 나가지 못하면서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만 꿈뻑거리며 다시 그 공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크리스티안에게 마트라는 장소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했다. 과거 잘못된 일을 저질러 투옥 생활을 한 바 있는 그에게는 더 이상 향유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남아있지 않다. 그에게 남아있는 일상이라곤 함께 잘못을 저질렀던 나쁜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과 약에 쩐 저질스러운 것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가 처음 마트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지만, 마트의 거대하고 웅장한 외연과 바깥과는 전혀 다른, 한 번도 알지 못했던 시스템 따위의 비일상적인 모습에 전율을 겪고 나서는 그 곳에 있는 걸 즐기게 된다. 아마 평범한 일상은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었고, 그러나 이런 비일상 가운데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편안하게 느껴졌을테다. 그리고 그 비일상이 자신의 일상으로 다가왔을 때, 그는 이곳에서 나가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손에 주어진 이 일상은 그에게 뿌듯한 행복이다.


 이곳에서 사랑마저 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나의 삶의 기반이 되는 장소라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스로에게 궁극의 행복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랑은 마트에서 그에게 다가온다. 자신이 속한 통로에서,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진열대 반대편 통로 사탕 코너에 있는 그녀를 바라볼 때, 그는 아직 그녀에게 다가갈 권한을 얻지 못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휴게실에서 커피를 뽑아먹으며 그녀와 대화를 한 순간, 점점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다, 이윽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감정의 교류를 나눈 순간,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크리스티안이 마트와 친숙함을 느끼게 된 과정과 많이 닮아 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마리온이 사실은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는 건 엄청난 거절감으로 다가왔을테다. 자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그녀가 사실은 자신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편하게 느껴졌던 마트와도 거리감을 느낀다.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업무가 어색해지기만 하고, 마트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는 지게차 운전도 별 어려울 것도 없는데 자꾸만 실패한다. 그녀가 떠나가는 날에는 자기가 간신히 쟁취했던 지금의 일상을 떠나, 한 때 자신의 일상이었던 타락의 온상으로 일탈을 감행하기도 한다.


 인물-공간-인물로 이어지는 이 미묘한 연결고리는 영화의 텐션을 유지시키는 장치다. 마트라는 매개체를 통해,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또 가까워지는 이 모든 과정을 보는 건 이 이야기가 아주 평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우리의 일상을 어디로 설정하는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크리스티안에게 있어 자신의 일터는 곧 스스로의 일상이자 자신을 증명하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일하는 곳에 애정을 갖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일상이란 일이 끝나고 난 이후에 갖는 나의 개인 시간에 있다. 이를테면 내가 몸을 담은 동호회, 혹은 연인과의 시간, 친구와의 시간,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조용한 나의 방. 자기가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자기가 하루 중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실제로는 나의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일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순간 인지부조화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크리스티안에게 마트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중요한 매개체로 기능하는가. 어쩌면 가끔 내가 겪는 우울함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디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3


 한국에서 마트를 다룬 다른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카트>와 <송곳>이 떠오른다. 두 작품 다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 사회 최하층에 있는 것처럼 그려지는 비정규직들의 투쟁이다. <인 디 아일>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크리스마스에,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 싶을 때, 폐기로 버려야 하는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찾고 그것을 우걱우걱 먹는 모습은 이들도 남들 못지 않은 사회 하층민 계급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앞에 말한 두 영화와 달리 이 영화에서는 연대하고 투쟁하는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이들은 분명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한국의 경우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조심스럽게 유지한다. 그렇게 가깝게 지냈으면서도 마지막 브루노의 자살에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던 동료들의 허탈함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의 연대는 다만 직장 동료로써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얕은 수준의 이런 연결은 그러나 이들이 서로에게 무심하고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마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른바 한(恨)으로 대표되는, 억울하면서도 열정이 넘치는 그런 분위기 대신 <인 디 아일>의 마트에 짙게 깔린 감정은 지독한 고독감과 우울함이다. 영화 내내 마트는 유쾌한 톤을 유지하지만, 중간에 드러난 '바다', 즉, 생선이 팔릴 때까지 갇혀 지내야 하는 아주 작은 물통에서 드러나듯 그들은 삶을 포기한 것처럼 조금 초연한 태도를 견지한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건 결국 스스로뿐이라는 서구적인 가치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들을 휘감고 있는 이 짙은 우울함의 감정은 어디서 비롯하였는가, 이 감정은 브루노를 자살로 몰고가기도 한 그것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브루노가 크리스티안을 초대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브루노는 독일 통일 이전에 트럭 운전수였다. 그러나 통일이 되고 나서 직업을 잃게 되자 이 작디 작은 마트 속에 갇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마트 생활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에게 가장 힘든건 자신의 자유를 빼앗겼다는 생각이다. 사회주의였던 동독에서, 통일이 되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닌 통일 독일에 살게 되었으나, 자본주의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마트에서 일하며 오히려 자유를 빼앗긴 느낌이 든다는 건 아이러니한 은유다. 그러나 이런 발상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저항으로까지 간다면 잘못된 접근이다. 이건 오히려 근대화에서 비롯된 기계화에 가깝다. 아주 작은 곳에 갇혀 매일 똑같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어떤 새로운 동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4


 다시 생각해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다' 장면이다. 몇 마리의 생선들이 눈을 꿈뻑거리며 좁은 수조 안에서 꿈틀대는 건 징그럽고 애잔하다. 특히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튀어오르는 장면까지 지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우리는 브루노가 유산으로 남기고 간 파도 소리를 듣는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어떤 이상향을 꿈꾸게 할 수 있는 장난스런 행위. 눈 앞에 실제하는 '바다'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형편없는 장소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진짜 바다는 영원히 푸르다. 마음 속에 그걸 품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면 조금 괜찮아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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