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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느리고 둔한 복수자.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Michael Kohlhaas), 2013>

1


 우리는 복수극에 열광한다. 복수란 살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말초적이고 짜릿한 쾌감 중 하나이지만, 마음껏 해대기에는 후폭풍이 무서운 양날의 검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직접 복수를 실행하는 대신 우리는 누군가 대신 복수를 실행하는 걸 관찰하길 즐긴다. 우리는 정말이지 이중적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온다는 말로 점잔을 빼면서, 복수와 쾌감이라는 단어를 함께 쓰기 거리낌이 없다. 나 또한 복수극을 좋아한다. 죄를 지은 자들이 벌을 받는, 미적지근한 법의 심판 따위가 아닌 철권을 통한 신체적인 방법으로 응징을 당하는 그런 영화들이 본능적으로 좋다. 


 사회가 복수에 열광하는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 건 그들 모두가 무언가에 억눌려 있다고 생각할 때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억눌린 사회라고 한다면 최근의 한국 사회를 당연히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교묘하게 말을 바꾸어 우리는 복수라는 말 대신 '사이다'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며 권선징악을 칭송한다. 그러나 그 때의 권선징악에 있어 추구하는 가치는 '권선'이 아닌 '징악'이라는 건 씁쓸한 일이다. 사실은 선이라는 고리타분한 가치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잘못을 한다면 그대로 벌을 받는 게 좋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아닌 남이.


 '사이다'라는 용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원래는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할 때 사이다를 먹은 것처럼 속이 뻥 뚫린' 상황을 비유로 들며 탄생한 단어다. 그러나 이제는 '고구마'라는 말보다 '사이다'라는 말이 더 자주 들리는 기분이다. 답답한 상황은 끝도 없이 있고, 마치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당연시된 나머지 특별히 어떤 용어를 통해 그걸 부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고구마'로 가득 찬 사회에서 필요한 건 오로지 '사이다'뿐일테다. 


 그러나 '사이다'라는 말이 단독으로 사용된다는 건 조금 무서운 일이다. 해결 방안으로 존재하는 용어가 문제의 원인도 없이 단독으로 사용될 경우, 어쩌면 문제가 없을 때에라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해결해버리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구마도 없는데 사이다를 부어버리는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나의 주변을 본다. 나는 너를 괴롭힌 적이 없는데, 너는 나에게 '사이다'로 둔갑한 복수를 해내고야 만다. 단지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거나, 높은 직위에 있다는 등의 우월한 위치에 놓였다는 이유에서 나는 '사이다'를 부어야 할 대상이 된다. <더 퍼지>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마치 법이 존재하지 않는 날, 억눌린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아무에게나 풀어내는 모습이다. 우리 모두는 왜 이렇게 다들 화가 나 있을까.



2


 사람들이 복수극의 카타르시스를 즐긴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영화에서 복수는 편리한 소재가 된다. 최소한의 개연성을 지키며, 영화가 제공해야 할 아드레날린의 분출을 위해 등장인물이 누군가를 죽이고, 부수고, 때리고, 훔치고, 골탕을 먹이는 일을 벌이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만 할 극적인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인간이 갑자기 타인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동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가장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건 복수의 존재다. 말도 안되는 액션 장면을 넣어놓고 복수 때문에 그랬다고 하면 왠만하면 말이 된다.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혹은 다수나 사회에게 부당한 일을 당할 경우, 심지어는 그걸 통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면 당사자는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고 극적인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는 꾹 참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쪽이 조금 더 상식적이라고 여겨질테지만, 나의 주변에서도 그렇게 되고야 만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 돌아오지 않는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시도가 성공했을 경우의 카타르시스를 위해서일테다. 다시 자신의 몫이었던 것을 돌려받는 건 부차적인 이유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때의 쾌감은 마치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당연하게 손에 넣어야 될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도 있다.


 복수라는 사건이 매우 감정적이고 극적으로 이루어지는만큼, 복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단어를 하나 골라본다면 거기엔 아마 신념의 존재가 있으리라. 신념과 복수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지금껏 지켜오던 신념을 복수 때문에 저버리는 게 일반적이다. 감정에 휩싸여 일상을 버리고 비일상의 영역으로 발을 옮기는 복수를 행할 때, 이성의 극한에 다다랐을 때에야 고수할 수 있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는 건 일견 불가능해 보인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의 미하엘 콜하스는 그러나 복수와, 신념을 양 손에 하나씩 쥐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일종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분노에 휩싸이지만, 대나무처럼 올곧은 신념을 전혀 놓지 않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이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많은 울림을 준다. 이렇게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해낼 수 없겠지만,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사람들을 역사는 기억하곤 한다.



3


 그의 분노를 촉발한 건 거대한 사건이 아니었다. 말 두 마리를 빼앗겼을 따름이었다. 엄청난 거상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집안이 무너질 정도의 사건은 아니다. 부유한 편이었던 그는 귀족에게 상납한 셈 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테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신이 당한 일이 부당한 일이라고 여기자 자기가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해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자 한다. 하지만 공고한 법보다는 권력이 우선시되는, 아직은 느슨한 체제의 자연 상태에 가까운 봉건 시대의 사회는 그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포기할 법도 하지만 그는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다 아내가 공주에게 청원하러 갔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오자, 그는 항거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복수가 인상적인 점은 개인의 일탈에서 촉발한 부당함의 몫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나의 말을 돌려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응당 가져야 할, 아니 분명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할 권리를 이행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걸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야말로 그가 복수할 대상이었다. 미하엘의 딸이 그에게 그가 시작한 행동의 이유가, 어머니의 죽음에 있는지, 혹은 부당하게 빼앗긴 말에 있는지 묻자, 그는 둘 다 아니라고 대답한다. 또한, 그는 복수의 끝을 시작부터 정해놓는다. 복수란 그 파멸적인 속성 때문에 점점 몸집을 불려가 자신에게 상관하는 모든 이들을 파국으로 이끌곤 한다. 끝을 알지 못하고 날뛰는 복수라는 야생마에게 씌워진 고삐는, 미하엘이 이미 정한 복수의 끝이었다. 자신이 받아야 할 권리만 받고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스스로가 지는 것, 그는 인간을 초월한 방법으로 복수를 길들이고 그 고리를 끊어낸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그가 손에 넣은 병력은,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직접 나설 정도인 상황에서 그걸 알 수 있다. 미하엘은 손쉽게 자신이 잃었던 것의 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시스템을 전복시키고 제대로 된 시스템을 새로 구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건 이미 구축된 시스템의 정상화였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보수적인 방법론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따라오는 수많은 질문들을 남긴다.


 카타르시스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여왕과 마주했을 때, 그녀의 목을 따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병력을 가지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하엘은, 이 영화는 그렇게 나아가지 않는다.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할 것들이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 돌아갈 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윤리의 문제를 모두가 아는대로 따라갈 뿐이다. 이 영화는 그러므로 지루하고 따분하다. 그렇게 느끼라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 사건인 전투도 심심하기 그지없다. 왜 지루하고 따분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당연히 그래야만 했던 일들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가. 질리도록 감상해왔던 여타 다른 블록버스터의 카타르시스는 과연 윤리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4


 마틴 루터와의 대담이 인상깊다. 종교개혁을 했다고 알려진 인물인 마틴 루터는 당대 매우 진보적인 인물이었으나, 이 영화에서는 보수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역설한다. 우리의 무기는 칼과 총이 아니라 십자가와 인내임을 잊었느냐. 우리에게 승리란 지배와 권력이 아니라 복종과 권력임을 잊었느냐.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칫 타락한 기독교인의 발언으로 오인받기 쉬우나, 실제로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그가 개혁을 주도했던 진보적인 인사였음을 잊어선 안된다. 성경에 나오는 욥이라는 인물은 근방의 모든 도시에 알려질 정도로 부유한 자였지만, 신이 허락한 악마의 시험으로 모든 부와 자식들마저 잃게 된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신에게 등을 돌리지 않고 믿음을 고수한다. 그 결과 그는 다시 자기가 가졌던 모든 부와, 그의 배를 선물받는다. 그는 마틴 루터가 말하는 기독교적 가치의 귀감이다.


 미하엘은 그러나 거기에 순응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부품이 되기에 망설임이 없는 자지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정의를 끝까지 고수한다. 당신이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하는 방법은 죽이지 않는 거라는, 평화를 이룩해야만 한다는 마틴 루터의 말에도 그는 설득당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틴 루터는 나쁘고 미하엘은 옳은 사람이라는 태도를 가지기 쉬울지 모른다. 올곧은 자를 살살 꼬셔 지배계층의 논리에 두려 하는 인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마틴 루터는 그의 행동을 '신념'이 아닌 '이념'이라고 칭한다. 그의 이념이 언젠가는 스러질 것이라고 여긴다. 이 말이 재밌는 건 그렇게 부르는 것을 통해 마틴 루터가 역설하는 '정의'도 '이념'이라는 걸 증명하기 때문이다. 미하엘의 정의가 있고, 마틴 루터의 정의가 있다. 두 정의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방향성만 있을 뿐이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는데 우리는 어떤 것이 틀렸는지 가려내야만 한다.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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