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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예술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잖아.

<시저는 죽어야 한다(Caesar must di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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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내 삶의 일부는 앞으로도 예술의 몫으로 남아 있을 예정이다. 하루의 한 부분은 여전히 영화가 채우고 있고, 글을 쓰고 읽는 것도 나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심심할 땐 음악을 듣고, 고전부터 현대까지 어느 시대든 미술 작품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울림으로 마음에 닿곤 한다. 예술을 버리지 않는 삶, 허세가 아닌 진정한 의미로 저 문장을 나의 좌우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 되고야 말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중이다. 그러면 예술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예술은 무엇인가. 나름대로의 답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다시 흐릿한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부옇기만 하다.


 예술이 스스로 예술에 대해 다루는 건 흥미로운 주제다. 일반 대중과 어느 정도 괴리감을 갖는 예술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주제이고, 예술가들은 자신이 매일 하는 것이니만큼 그 바닥의 생리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고 있어 자신있게 묘사해낼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 영화 감독이나, 혹은 영화에 종사하고 있는 이로 자주 나타나는 것도 그런 맥락일테다. 특히 영화를 찍는 영화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다. 다른 주제보다도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감독의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같은 장르가 아닌 다른 장르의 예술을 다루는 것 또한 재밌다. 영화가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른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예술이라는 가치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기 쉽다. 서로 다른 두 매체의 합의점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그 중에서도 연극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다른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연극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극은 실시간으로 드러내고, 영화는 정제된 상태로 나타낸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 영화가 주목하게 되는 건 공통점인 연기라는 요소다. 그 다음에는 예술 자체에 대한 사색으로까지 나아간다. 이 영화는 배우를 기용하지 않고 실제 감옥의 재소자들을 배우로 사용한다. 이렇게 하는 걸 통해 정제된 연기 톤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연극 내용만을 다루는 게 아닌 연극이 처음 구성되고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다루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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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인 타비아니 형제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우연히 한 교도소에서 매년 재소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데서 비롯한다. 연기 훈련을 특별히 받지 않았다는 점과, 범죄자라는 점, 이런 특별한 점이 흥미롭다고 생각한 감독은 이들을 주연으로 영화를 촬영하게 된다. 아마추어가 예술을 할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렇게 절박하지 않다는 점이다. 미래 배우 지망생들이라면 몰라도 연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이들에게 갑자기 연극을 시키면 적당히 극만 완성하게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교도소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는 속성은 그들이 극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작은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생각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연극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흥미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테다. 열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노력은 때로는 전문가의 그것보다 나을 때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어떤 울림을 주기 마련이다.


 연출된 상황이 아닌 실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주제 삼아 영화를 촬영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인 듯, 극영화인 듯 그 중간 어디쯤의 애매한 지점에 서 있다. 여기서 풍기는 묘한 기운은 영화 전체를 휘감고 있다. 분명히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뿜어내는 감정은 실제로 그들이 그 순간 느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영화의 형식조차 이렇게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는데, 내용 또한 그 형식을 많이 닮아 있다. 연극을 올리려고 연습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아직 무대 위에 올라서지 않았음에도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자신의 상황을 몰입해 연습이라는 사실을 잊고 과몰입한다. 이윽고 이들에게 연기와 현실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그러져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킨다.


 이를테면 연극에서 배신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 뿐인데, 연기하는 배우들이 실제 자신들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입해 갑자기 대사를 바꾸며 실제로 싸우려 든다. 연극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흥미 본위로 시작했던 연극에 이렇게까지 몰입하게 될 줄은 그들조차 몰랐을 것이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연극 속 인물에게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데 있다. 이들이 연기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속 인물들은 시저와 그 측근들이다. 이들은 로마라는 거대한 나라를 이끌던 엘리트이자, 누구보다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장군들이다. 그들에게는 명예와 정의가 가장 큰 가치였다. 사회계층의 가장 바닥에 존재하는 범죄자들과는 정반대의 인간상이다. 


 때때로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한다. 내가 살아온 배경과 어느 한톨도 같은 모습이 없는 이들에게 나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 중서부에 사는 중산층 백인과 나의 삶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을테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고, 그들의 행동에서 나의 역사를 읽는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걸까. 이런 현상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같은 종이 가친 보편적 개념에서 비롯한다. 범죄자와 엘리트는 단지 그 태어난 배경이 다를 뿐, 본질에 있어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나와 영화의 주인공도 그렇다. 그리고 타인에게서 나의 모습을 볼 때 나는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또한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동시에 느끼고,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도 가능해진다. 나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탐구로 향하고, 그 역도 동일하다.



3


 영화의 마지막,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방으로 돌아온 재소자는 독백을 하듯 조용히 읊조린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이 대사에서 모든 영화가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영화의 정수를 꿰뚫고 있는 문장이다. 살인도 서슴지 않던 범죄자들은 마치 홉스적 자연상태 아래에 살던 인물들이다. 자신의 생존이라는 가치를 가장 우선으로 삼아, 남에게 해를 끼치더라도 스스로의 이익을 가장 최우선으로 행동하던 이들이다. 이들이 남을 해치고, 돈을 뺏고, 사기를 치는 건 이들 나름의 생존전략이었을테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런 일차원적 본능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그들은 도덕률과 대의명분이라는 이른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도 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세계에는 이런 인물이 존재한 역사가 없고, 심지어 그게 자신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을 지 모른다.


 예술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유희다. 예술이 없어도 우리가 목숨을 연명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단순히 지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 그렇게 수고를 들이는 이런 행위는, 밑바닥 인생을 살던 범죄자들의 삶과는 완벽한 대척점을 이룬다. 이들에게 아마 예술은 그저 부자들의 유흥거리, 혹은 돈벌이 수단이었을테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에서 행위자가 되어 직접 참여한 것으로,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몸소 체험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술이란 사실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지독하고 치열한 탐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단지 돈놀음과 여가 생활이라고 치기에는 이들의 사유는 깊고도 넓다. 이렇게 치열하고 지독한, 아름다움과 가장 멀리 있는 것들을 뭉쳐 미(美)로 승화시켜내는 어려운 과정을 겪어내기 때문에, 이들의 가치가 그렇게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들의 삶의 질이 갑자기 떨어진 건 아니다. 이들의 삶은 이전이나 이후나 같은 수준으로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깨달은 건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 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달은 것과 같다. 이들은 불행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경험을 통해 이들은 이제 치열하게 위로 올라가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엔딩 크레딧에서 재소자들이 영화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통해 그걸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하찮은 삶을 하찮은 것으로 깨닫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광활한 세상에 벌거숭이로 내동댕이쳐져 하루하루를 버텨가야 하는 우리에게 예술이 주는 순기능이 아닐까. 비록 입에는 쓴 약이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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