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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사랑 앞에서 우리는 광인을 자처한다.

<라이크 크레이지(Like Craz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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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thought I understood it, that I could grasp it, but I didn't, not really. Only the smudginess of it; the pink-slippered, all-containered, semi-precious eagerness of it. I didn't realize it would sometimes be more than whole, that the wholeness was a rather luxurious idea. Because it's the halves that halve you in half. I didn't know, don't know, about the in-between bits; the gory bits of you, and the gory bits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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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쩔 수 없이 인정해야겠지만, 한낱 인간의 삶에서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의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동인이 존재한다면야 아마 그건 사랑이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나의 짧은 역사에 적힌 사랑의 순간들에선 기적의 형상이 아직까진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기적이 그렇게나 자주 일어난다면 기적이 아니라, 음, 하여튼 다른 이름을 붙이는 편이 나을테다. 그러니까 예언서라도 되는지 사랑이 일으키는 기적을 다뤄야만 할 의무라도 지고 있는 것처럼 무수히 쏟아지는 기적을 품은 로맨스 영화에 내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건 내가 시니컬한 사람인 것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들을 하는 영화에 마음이 간다.


 <라이크 크레이지>의 사랑 이야기가 영민하다고 느껴지는 건, 지극히 현실적이고 입이 쩍쩍 갈라지는 이야기를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로맨스 영화의 겉모습을 흉내내고 있기 때문이다. 으레 이런 감성을 공유하는 이야기들이 로맨스의 안티테제가 되기 위해 한껏 뒤틀려 있는 것과는 또 다른 행보다. 그러나 이런 지점들이 단순히 영화가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반전이나 이야기 비틀기 따위의 맥락에서 등장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현실에서의 사랑이 얼마나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사랑 또한 처음 시작할 때는, 어느 로맨스 영화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어여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얇게 칠했던 금박이 벗겨지고 난 다음에야 녹슬고 거친 표면에서 철가루가 우수수 떨어지겠지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영화가 끝나고 많이 울었다. 글로 적어 보려고 다시 영화를 본 오늘도, 조금 울컥했다. 영화가 들려준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나의 지난 시절 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사랑의 모양이, 평범한 우리가, 내가 품고 있는 그것과 아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좀처럼 추천하질 못한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사랑했던 사람에게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마음을 후벼파는 송곳 같은 영화가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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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때문에 후회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보라서, 앞뒤 재지 않고 불나방처럼 파멸로 향하는 길에 몸을 던지는 건 아닐테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자기 기준에서는 제 앞가림을 할 정도로는 똑똑하다고 여긴다. 다만 내가 아무리 내 앞가림을 잘 하던 사람일지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우리 눈을 다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너무 커다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탓이다. 심지어는 사랑이 우리 인생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때에도 그렇다. 취급주의라고 커다랗고 빨갛게 쓴 글자를 보고서도, 덥썩 움켜쥐고 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애나는 얼핏 보기에 쉽게 사랑에 눈이 멀어 바보같은 선택을 반복하는 철없는 대학생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이콥을 만나기 전까지의 그가 사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위에 인용한 그의 글에서 어렴풋이 찾아볼 수 있다. 애나는 너의 반쪽을 반으로 나눈 것의 반,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부분만 가지고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너와 나를 함부로 뒤섞고, 사랑에 대해서 모두 이해했다는 것처럼 구는 태도에 대해서 적었다. 감히 추측컨대 이건 자신의 이야기었을테다. 지난 사랑의 기억에서 함부로 사랑에 뛰어든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는 것이었을테다. 혹은 그가 이전에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사랑에 대해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스스로 꾸준히 경계하고 있음에도 제이콥이라는 '운명의 반쪽'을 만나자 애나는 스스럼없이 경계를 풀고 그에게 녹아들어간다. 이전까지의 그의 태도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마치 이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다. 자신의 선택이 사랑의 기적을 불러일으킬거라 착각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도 그게 로맨틱한 사랑의 기적이라고 믿는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으면서, 피투성이의 나와, 피투성이의 너라고 적었으면서.


 재밌는 것은 이렇게 하염없이 서로에게 젖어가는 젊은 커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눈 먼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지언정 관객들은 알 수 있도록, 영화는 이 둘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암시하는 장면을 꾸준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애나와 제이콥이 여행을 떠났을 때, 호텔방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방에 처음 들어와 구경을 하면서 창문을 열어보다가, 애나의 손가락이 창틀에 끼인다. 제이콥은 많이 다쳤는지 보여달라고 하지만, 애나는 볼 것도 없이 사소한 문제일 뿐이라며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괜찮아졌냐는 말에 애나는 대답하지 않고, 제이콥은 조금 옆으로 떨어진다. 그 뒤에 살짝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듯 하지만 귀여운 키스와 함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둘은 서로에게 집중한다. 이렇듯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고 조금씩 엇나가지만, 그 간극을 사랑으로 얼추 떼우려는 이들의 모습이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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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자 문제가 얽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사랑에 집중하기로 하자, 함께 있을 수 있는 행복한 순간은 정말 찰나처럼 지나간다. 로맨틱한 음악이 흐르며 이 커플의 사랑의 도피는 몇 번의 잠자리를 빠르게 점멸시키는 편집과 함께 15초만에 흘러가버린다. 그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얻은 거라곤 고작 15초 동안의 행복이다. 허무할 따름이다. 그리고 대가는 아주 크다. 애나는 제이콥을 만나기 위해 런던에서 다시 LA로 오지만, 입국조차 하지 못하고 공항에서 쫓겨나고 만다.


 런던과 LA라는 아득한 거리의 장거리 커플인 이들에게는 연락하는 것조차 큰 장벽으로 다가온다. 나의 낮은 너의 밤이고, 너의 밤은 나의 낮이다. 어제까지 안고 있던 품의 공백은 불안함으로 가득 찬다. 너는 지금 다른 사람과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난 게 아닐까. 간신히 연결된 통화에서 다시금 사랑을 약속해보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심지어는 애나를 만나기 위해 제이콥이 런던까지 찾아가기도 하지만, 그것도 며칠이 지나면, 그뿐이다.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들은 또 다른 이들의 품으로 향한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도 서로에게 향해 있다. 이들은 눈 앞의 상대를 끌어안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사랑에 눈이 멀어 내린 한순간의 잘못된 결정은, 서로를 넘어 이제 타인에게까지 그 독소를 뿜어댄다. 하지만 서로의, 어쩌면 서로도 아닌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아야만 하는 이들은 자신의 불륜을 애써 로맨스로 포장하며 하루를 버텨내기 바쁘다.


 시간과 공간이 사랑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이란 건 안타까운 사실이다. 이미 상처를 입히고, 입는 데 지친 이들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서로에게 향하는 것뿐이다. 모든 걸 털어버리고 결국 둘은 다시 하나가 된다. 모든 역경을 뚫고 이루어낸 결실이지만, 상처뿐인 영광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이들은 함께 샤워를 한다. 서로를 끌어안아보기도, 입을 맞추어보기도 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다. 텅 빈 인형처럼 그들은 표정없이 서로에게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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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분명 우리에게도 서로를 목숨바쳐 사랑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이 둘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잔인하게도 영화는 시작과, 중간과,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까지 보여주고도 결말은 보여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영화가 어떤 관계의 시작을 그리지는 않아도 (완전한 결말은 아닐지언정) 끝은 포함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물론 끝을 그리지는 않아도 불 보듯 뻔한 일인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이렇게까지 상처받은 이들이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싶다. 어쩌면 이 둘은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해서 지난 날의 상처들을 모두 치유할 수도 있다. 끝을 구태여 보여주지 않는 까닭은 어쩌면 이 둘이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의 암시일 수도 있다. 이들의 시작은 지금의 순간을 암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뒤의 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다. 만약 이 둘이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당연히 기적이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 둘이 사랑의 기적을 일구어낼 거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에서도 기적을 기대해볼 수 있다. 멍청하게도 그렇게 다시 사랑을 믿으며, 다시 사랑으로 몸을 던지는 불나방같은 우리들의 모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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