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Brad's Statu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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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느끼는 모든 감정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려 들던 때가 있었다. 어떤 것보다 오직 내 감정이 가장 소중했던 나는 외부세계의 모든 사건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스스로를 보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굴을 파고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끝까지 들어가면, 무언가 깨달음이 있었을거라 믿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와중에 떨어져나가는 관계들에는 의미를 두지 않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떨어져나갈 인연이라면 애초에 이어갈 의미가 없다.'는 말을 스스로 되뇌였다. 당연하게도,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 감상이 완성되는 시점은 영화의 이야기가 나의 개인적 역사와 결합하는 순간이라고 믿는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때로는 국적도 인종도 문화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와 아주 많이 닮아있음을 느끼는 때가 있다. 인간의 본성이란 모두 엇비슷한 것이고 같은 종으로써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가 있는 탓이겠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개인적으로 나의 영혼에 와닿는 때가 분명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마주할 때, 나라는 개인은 남들이 느끼지 못한 어떤 것들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이미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받아들이는 나의 경험과 융합해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저자의 죽음이자, 독자의 탄생이다.
미리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이 영화가 그런 영화였다. 그러니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여러분과 나의 감상이 확연한 차이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한 때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어떤 의문에 대하여, 거의 완벽하게 흡사한 사유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필연적으로 나의 감상은 여러분의 그것과 다를 것이고, 그 차이와 간극을 메워나가는 일은 또한 새로운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지만 나의 이야기에서 또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도 있다. 때로 그런 순간을 마주하게 되면 난 당신과 영혼이 이어져있는 느낌을 받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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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는 중년의 위기에 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잠자리에서 문득 나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생각이 솟아오른다. 중년의 위기란 쇼비즈니스에서 흔히 놀림거리나 농담의 소재로 사용되곤 하지만,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그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심각한지는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정신적인 불안정 상태는 생각보다 흔하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거나, 이뿐만 아니라 나의 사고와 행동의 근간을 지배하는 것이 무너진다고 느낄 때 우리는 이런 감정을 느끼곤 한다.
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마치 통과의례라도 되는 양 느낄 수 있는 경험이기 때문에, 너만 겪는 것이 아니니 별 것 아니라는 듯 치부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겪는다고 별 것 아닌 건 아닐테다. 사람들은 몸이 아픈 건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도 마음이 아픈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나에겐 나만의 고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겐 자신만의 고통이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걸 하나로 엮어 얼버무리고야 마는 걸까.
남의 아픔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아픔마저 존중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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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가 겪는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난 나를 추켜세우거나 비하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 라는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삶의 어떤 순간에서,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을 '내가 아닌' 이들로 묶어서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스스로의 가치를 끊임없이 규정하려 들고, 증명해내고자 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세상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때의 나에게 있어 내가 아닌 모든 이들은 나를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적일 따름이었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그 답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을거라 여겼다. 나에게 가장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은 나이고, 나의 안을 끝없이 파고들어가면 거기서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 브래드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대학에 간다는 큰 사건을 앞에 두고도 그는 도무지 아들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고 스스로의 문제에만 집중한다. 나아가서는 아들이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마저, 사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들의 문제일 따름인데 자신의 문제로 치환해버린다. 브래드에게 있어 아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객체일 따름이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화나면 벌컥 화를 내고, 누그러지면 화해를 청한다. 이기적인 모습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사유의 근간이 거기에 있기도 했고, 예술가들이 얻는 영감의 원천은 대부분 내부 세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극이 일어난다. 파고 들어갈수록 나의 밖에 펼쳐진 외부세계의 거대함만큼, 나의 마음 속도 이토록 넓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궁극의 답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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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라본다. 공기가 코를 타고 기도로 흘러들어와, 가슴팍을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진다. 폐부 깊이 들어찬 공기를 다시금 입을 통해 내쉬어본다. 마음을 꽉 채우던 것들이 사라진다. 괜찮다. 다시 숨을 들이쉬면 되는 일이다. 살아있다는 실감을 해본다. 끊임없이 숨을 쉬어야 한다.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제 눈을 뜬다. 나의 주변을 채우는 모든 것들을 본다. 그리고 너무 많이 커버려 거대해진 나의 몸뚱이를 본다. 생각해보면 나의 육체가 이곳에 살아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 공기, 물, 음식, 옷, 집 등은 나의 생존을 보장해주고, 옆에 자고 있는 아들의 존재, 아내, 동료, 친구들과 같은 다른 사람의 존재는 나의 영혼을 살아있게 만든다.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걸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되, 나를 채우는 수많은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사랑하자. 계속 사랑하자.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