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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5. 2019

패배자는 죽어야 한다.

<필스(Filth),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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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잔인하다. 각계각층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생은 똑같이 매정하고 냉혹하다. 감히 누가 인생을 아름답다 했는가. 좆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될 따름인데 말이야. 세계와의 전쟁에서 한낱 개인은 언제나 패배를 부르짖게 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운명을 맞이했을 때 대응하는 방법은 단 두가지다. 승리자의 자세를 취하고 의기양양하게 패배를 부정하던가, 패배를 인정하고 바닥에 납작 기어 비굴하게 사는 것이다. 어느 쪽도 더 나은 것은 없다. 패배는 이미 정해진 일이며, 누구도 거스를 수는 없다. 이 잔인한 인생 앞에서.


 삶을 살아가다 보면 깨닫는 이러한 진리는 종종 우리를 좌절하게 하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깨닫는 진리는 종종이 아니라 사실은 매번, 한 순간도 빠짐없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알게 되는 건 두 주먹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에게 어느 누구도 자비를 베풀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는 이가 등장했을 때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에게 대가를 회수해가려 든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을 수록 우리는 조금 덜 잃을 수 있다. 때문에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파악하게 되지만, 비극이 찾아오는 지점은 때로는 나 자신마저 스스로를 배신하는 때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 못이겨 스스로를 속이고 정의를 위한 지난한 투쟁을 그만두어 나를 괴롭히는 세계의 충실한 개로 거듭나는 '또 다른 나'의 영악한 부분을 마주했을 때 사람은 자멸하곤 한다.


 <필스>가 그리는 것은 이런 잔혹한 현실이다. 영화적으로 매우 과장되고 극적으로 그려지는 부분이 있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냉소적인 시선이 매력적이다. 다만 그런 부분이 너무 과한 나머지 사실은 영화적으로는 완성도가 높기 힘들다고 할 수 있겠고, 수많은 사람에게 명작으로 평가되기는 그른 작품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완전히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영화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심지어는 모든 문제에 해결책을 명확하게 제시해주기까지 하는데, 감히 답을 제시하려 드는 영화 치고는 드물게 사랑스럽고 완벽하다.



2


 브루스의 욕망은 모든 규칙을 벗어나 스스로 약동하고 몸부림친다.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킬 파도처럼 흘러넘치는 그의 욕망은 아주 매력적인 외견을 하고 있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매혹시켜 그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만든다.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추하기 마련이지만 이렇게까지 고고하게 스스로의 자태를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자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그의 일련의 행위는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캐릭터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관객은 처음으로 인지부조화를 겪게 된다.


 스스로의 욕망을 모두 실현할 수 있는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 이외에는 모든 이가 발 아래 짓밟혀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에게 있어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언을 구하는 모든 이에게 냉소로 답하고, 다가오는 위협은 완벽한 설계로 제거하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모두 품에 안는 그의 모습은 비록 사회적으로는 용인되지 않을지언정 모든 남자의, 아니 모든 인간의 구체적 욕망이다. 스스로의 욕망을 배제하고 사회에 편입되는 것이 시민으로써의 자세라면, 이 자는 그보다는 야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도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가장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백수의 왕처럼.


 영화의 말미에 그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두꺼운 안경의 회계사에게 조언한다. 더 많은 것을 쟁취하려고 하면 당신의 아내도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며. 그의 조언을 받아들인 회계사는 아내를 휘어잡아 마치 왕자님처럼 두 팔에 안고 거칠게 키스를 하는데, 샌님같던 남편의 이런 모습을 본 아내는 그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다. 이렇게 욕망을 분출하는 것은 때로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브루스가 이렇게 흘러넘치는 남성성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디였을까. 그의 끊이지 않는 욕망의 발원지는 어디였을까.



3


 그가 만들었던 스스로의 이런 이미지가 허상에 불과했음이 곧 드러나게 된다. 완벽한 아내와의 훌륭한 결혼생활은 그의 근간을 이루는 기반이었는데, 사실 이 가족이라는 아이덴티티는 이미 붕괴한지 오래였다. 아내는 그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갔고, 딸 또한 볼 수 없다. 누구보다 많은 여자를 품고자 하지만 아내를 사랑했던 그에게 남에게 무언가를 뺏긴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고, 그의 지고한 자아는 스스로를 속이기로 결정한다. 마치 아내가 아직 빼앗기지 않은 것처럼 여장을 하고 스스로 아내의 역할마저 감당하기로 한 것이다. 남성성의 한 쪽 극단으로 치우쳐있는 그에게 이는 굴욕적인 일이지만, 그는 자아를 두개로 분리시켜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또한 그는 어릴 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보다 모든 것이 뛰어난 형제를 석탄 산에서 밀어 죽인 이력이 있다. 지금의 승리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열등감의 발로는 지금까지도 환상으로 나타나 때때로 죽은 형제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헛것을 보는 그는 부서질 것 같은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마약으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산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섹스를 통해 스스로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증명하고자 한다.


 인생에서 승리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지만 그는 평범한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밑바닥에 깔린 패배자였다.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크게 스스로를 부풀리고 그곳에 허세를 가득 채운 그의 거대한 몸집은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곧 붕괴하고 만다. 마치 바닥을 채울 수 없는 독에 물을 부어넣듯이 그는 욕망을 짜내고 짜내어 어떻게든 붕괴한 자아를 이어붙이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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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괴하는 인간상에 대해 그린 영화는 너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바닥까지 내려간 그는 좌절하고 다시 원래의 작은 몸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가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Same rules apply."는, 그가 아무리 어떤 상황에 있어도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절대규칙이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 그리고 그게 스스로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업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야 마는 것. 나락으로 추락한 자신에게 단 하나의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이의 자비를 자신의 목에 휘감고, 이런 것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을 구원할지도 모르는 시도를 거부하고, 세상에 조소를 날린다. 아무리 인생이 나를 파멸시키려 할지언정, 결국 나의 패배는 예견되었을지언정, 적어도 나의 끝을 정하는 건 나야. 아무도 나를 지배할 수 없어. 그리고 그런 그의 미소를 보는 관객에게 솟아오르는 전율. 이 영화는 정말이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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