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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Mar 04. 2019

모든 피어나는 것들은 지는 순간을 담보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ジョゼと虎と魚たち), 2003>

1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사랑이 불멸할 것이라 착각하곤 한다. 처음 사랑을 손에 넣었을 때에, 그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사랑의 조각을 고이 가슴에 품으며, 절대 너를 내 손에서 놓지 않을거야.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그 순간, 부푼 꿈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불 보듯 뻔한 당연한 다음 순서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야 만다. 언젠가는 이 사랑도 끝이 나기 마련이라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 결국 사랑이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는 헤어짐이나 죽음 뿐이다. 그러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심지어는 이전에 사랑을 몇 번 경험해본 사람들에게또한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나의 사랑은, 나의 사랑만은 불멸할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다시, 또 다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떤 사랑의 일대기를 그린다. 사랑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을 물끄러미 관찰하는 이 영화는, 그러나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아득히 그리운 그 시절을 추억하는 아련한 정서에 가깝다. 나의 영혼에 맞닿아 있는 영화는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끝이라는 비극을 애써 숨기려 들지 않는 영화. 당연한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 종용하는 영화. 이런 영화는 사랑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영화들보다 훨씬, 어떤 의미에서, 현실적이기 때문에.



2


 일상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는 비일상은 우리에게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오곤 한다. 특히 매일의 삶에 큰 변화가 없는 지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의 추체험을 통해 잠시나마 나의 따분한 일상을 잊는 것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영화 뿐만 아니라 우리를 즐겁게 하는 대부분의 취미 생활은 그러므로 수위를 낮춘 일탈이라고도 정의해볼 수 있지 않을까.


 츠네오는 따분하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은 별다를 것이 없고, 무덤덤한 표정은 좀처럼 밝아질 일이 없다. 섹스 파트너까지 가지고 있지만 서로 육체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난다는 것 이외에는 오래 사귄 친구처럼 서로 사는 얘기나 하며 수더분한 관계로 지낸다. 새로 잘해보려는 여자도 있지만 막상 만나보니 지루하고 새로운 점이 없어 보인다. 그런 츠네오의 일상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조제였다. 소문의 수상한 유모차에서 갑자기 뚱한 표정을 짓고 나타나더니, 자신을 조제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질 않나, 다리도 못 쓰면서 집 안에서는 쿵쿵 떨어지면서 잘 돌아다니고, 책에서 들은 잡학들을 가지고 으스대는 말투로 뽐내기나 한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츠네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츠네오가 조제를 만나기 시작한 이유는 동정심에서 비롯된 호기심이다. 둘의 고결한 사랑에는 어떤 숭고한 동기가 있었을 것 같지만, 처음 시작은 단순히 장애를 가진 조제가 불쌍하고 신기했을 따름이었다. 츠네오의 이런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가 인격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으레 모든 시작은 그렇다. 관계의 시작부터 완벽한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모두, 기침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우연히 잡은 손이 따뜻해서,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예뻐서, 집중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웃는 얼굴이 잘 어울려서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이런 하찮은 것에서 시작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물며 어떤 이야기들에선 킬러가 자기를 죽이려던 대상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나오다가 문이 열리지 않아서 말을 트기도 하고, 식당에서 술을 쏟거나 실수로 발을 밟거나 하는 악연에서 시작하는 것은 거의 클리셰에 가깝다.


 이런 극적인 이야기들에 비하면 동정심이란 감정의 동인은 오히려 평범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특히 남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생각할 때 우리는 얼마나 더럽고 나쁜 생각마저 서슴지 않고 떠올리는지. 그런 우리가 츠네오가 조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동정심이라고 그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 물론 장애인에게 섣불리 동정심으로 접근해서 함부로 도우려 하는 것은 그들의 인생을 오히려 망쳐놓을지도 모르는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츠네오는 결국 영원히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을지언정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조제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었고, 함께 있는 모든 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관계는 비록 동정심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거짓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이윽고 끝이 다가왔을 때, 조제는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조제가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인 이유가, 단지 그녀가 살아온 날들만큼 함께한 장애가 학습시킨 무력감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조제의 모습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에 너무 충실했다.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츠네오에게, 가버리라고 소리치다가는 다시 가지 말라고 소리쳤고, 함께 떠난 여행에서 수족관이 문을 닫자 온갖 짜증을 부리며 절규했다. 조제는 자신의 현실에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발버둥쳐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조제는 단지 언젠가 끝이 온다는 진리를 이미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장애는, 혹은 그녀의 생존으로써의 독서는 그녀를 조금 더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 믿고 핑크빛 꿈을 꾸던 츠네오와는 달리, 그녀는 츠네오와 결혼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럴 리가 없잖아.’ 라며 담담하게 미소 짓는다. 그러나 끝을 알고 있다고 그녀가 슬프지 않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별 앞에 소리치고 절규하지 않고, 담담하게 마지막 농담 같은 선물을 건네는 인간상 앞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곪아 터지고 썩어 문드러지는 마음을 품고서도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인물의 속내는 과연 어떠한지. 




 영화의 주제가 ‘결국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으니, 사랑은 허무한 것이다.’ 라는 허무주의적인 태도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모든 피어나는 것들은 지는 순간을 담보하고 있기에 아름답다. 사랑 또한 끝을 품고 있기에 아름답다. 시작과 끝이라는 자연스러운 순환고리가 만드는 인간사의 수많은 엇갈림은,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지나고 나서 추억할 때 훨씬 아름답기 마련이다. 우리의 그 아름다웠던 순간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끝의 존재다. 이렇게 모순적인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조제는, 츠네오는, 여러분은, 또 나는 그렇게 수많은 이별의 시간을 지나온 것은 아닌지. 혹은 이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체험하는 게 아닌지. 그 진리를 깨우치기는 어렵지만, 끝이 왔을 때 담담히 끝을 마주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것들이다. 마치 하나의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 수많은 죽음이 그 위에 얹혀야 하는 것처럼. 


 나의 역사와 결합하는 것으로 비로소 완전해지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였고,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참 좋다.

이전 08화 여전히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헤매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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