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아 영(While We're Young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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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의 영화들은 어딘지 모르게 껄끄럽다. 말하자면 '그래서 제 얘기가 틀렸어요? 틀렸냐구요?' 하면서 잔혹한 현실을 턱 밑까지 들이대고 시종일관 실실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느낌인데, 그래서인지 그의 이야기는 항상 소화하기 힘든 음식처럼 조금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그렇게 껄끄러운데도 불구하고 뒷맛이 깔끔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껄끄러운 영화'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게 만들고 결국 마음 속에 커다란 짐을 남기는 경우가 많은데, 어쩐지 그의 영화에서는 그런 기분이 들지가 않는다. 문제의식을 쏟아내듯 제기하지만 우리에게 그걸 주워담으라는 부담을 지우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 선뜻 손이 가지는 않지만, 막상 보고나면 항상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의 작품에도 또한 일련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어 보인다. 이 세계에 존재하기 위해 아무것도 노력한 바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는 어쨌든 내일이 온다는 것이고, 삶이라는 긴 여행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어쨌든 내일이 온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앞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우리의 곁을 떠나가기 마련이다. 느리지만 아주 천천히 우리를 죽음이라는 확실한 끝으로 인도하는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다가오는 시간 앞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아갈 것인지, 거친 숨을 내쉬며 전력으로 질주할 것인지는 온전히 당신의 선택이다.
노아 바움백의 작품에 나오는 이들의 모습은 전자에 가깝다. 그러나 콧노래를 부르면서 경쾌한 발걸음으로 세상을 활보하는 데에 비해서 그들이 처한 현실이 그렇게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고난과 역경을 겪지만 자신만의 긍정의 힘으로 이겨내고 다시 웃음을 되찾는 것에 비해서, 그의 캐릭터들은 긍정적인데도 불구하고 참혹한 현실을 견뎌야만 한다. 한 번 웃어넘긴다고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하>의 프란시스는 이런 캐릭터의 전형과도 같다. 무한긍정으로 살아가지만 예술가가 살아가기엔 뉴욕은 너무 비좁은 도시이고, 그녀는 항상 어떤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당장 울어제낀다고 눈앞에 있는 문제가 없어지지 않을 것도 아니다. 결국 이것 또한 끝나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모든 사건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로, 해결되지 않은 채로라도, 이것 또한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때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껄껄 웃어넘기는 것 말고 우리에게 할 수 있는게 뭐가 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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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아 영>은 시간의 흐름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40대의 조쉬는 우연히 만난 20대의 제이미에게 영감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제이미라는 사람을 그대로 마주하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제이미는 말하자면 조쉬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어떤 인간상, 즉 영원히 청춘에 머무르고자 하는 욕망의 구체적 발현에 가깝다. 자신의 육체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젊은이의 에너지만을 끝없이 동경한다. 그러므로 제이미라는 인물을, 필요할 때는 아부와 거짓말도 서스럼없이 사용하는 전형적 악역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일 수 있다. 결국 제이미와 관계를 진행시킨 것은 조쉬였고, 그가 제이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는 마지막 장면 이전까지 이 영화에 제이미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조쉬와, 그의 순수한, 혹은 어리석은 욕망이 있을 뿐이다.
자아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대부분의 경우 독이 된다. 내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일생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고, 대부분의 경우 그 답을 알아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정의한 인물들을 우리는 성인이라 부르곤 한다. 예수나, 부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시간의 흐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요인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곤 하지만, 당장에 어제까지만 해도 돈까스가 엄청 먹고 싶었는데 오늘은 초밥이 먹고 싶어지는 나만 봐도, 이렇게나 변덕스러운 인간이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한 그 연속성에 대해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꾸준한 논의가 필요하다.
조쉬는 우리가 쉽게 빠지곤 하는 함정에 갇혀버렸다. 내가 되고자 하는 인간상이 나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해버린 것이다. 자아의 탐구라는 지난한 과정을 간단히 건너 뛰어버리고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간단한 해결책처럼 보이곤 한다. 물론 20대의 조쉬도 제이미에게 비견될 정도로 무한한 야망을 품고 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40대의 조쉬는 이미 그 시절을 아득히 지나온 지 오래다. 그가 10년 넘게 붙잡고 있는 다큐멘터리처럼, 그 자리에서 아직도 영원히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조금 더 비관적으로 접근하자면, 영화에서 보여지는 조쉬의 모습에서 추론해보았을 때 20대의 조쉬는 20대의 제이미에게 비견될 정도로 영향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성취한 것들만 기억하고 실패한 것들을 잊어버리고야 마는 인간의 교활한 마음은, 그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그 시기를 끝없이 미화하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아,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조쉬는 참 철없는 어른이다. 어쩌면 저 나이가 되도록 저렇게 철부지같은 생각을 하고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조쉬의 모습이 더욱 씁쓸하게 다가오는 연유는 이런 그의 모습이 나와 아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불안한 현재에서 도피해 영원히 과거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스스로를 고평가하고 우상화하지 않으면 스러질 것만 같은, 고작 이렇게 작은 것들만 이루어내며 살아온 나의 모습은 그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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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은 퍽 희망적이다. 제이미의 악행에 대해 낱낱이 까발리고 승자가 될 것이라고 의기양양하던 조쉬는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대수롭지 않아하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폭로했는데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상황은 트라우마가 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쉬에게만 잔혹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이 패배자의 모습이라기보단 깨달은 자의 모습과 닮아있는 건 왜일까.
손에 꽉 쥐고 있던 잘못된 신념을 내려놓는 것은 성장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다. 비로소 그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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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는 나쁜 사람일까? 조쉬에게는 아마 그렇다. 생각해보니 나쁜 사람인지 정의하는 것은 너무 포괄적인 감이 있다. 그렇다면 제이미가 조쉬에게 한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을까? 그건 아니지 않을까. 제이미는 조쉬의 작품을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조쉬는 그것을 연을 놓기 위한 비겁한 계략이라고 여겼지만 글쎄, 그렇게만 파악하기에는 제이미라는 인물이 그렇게까지 꼬여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분명 능글맞고 검은 속내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힙스터의 모습으로 잘 포장하여 감추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가 '위장'하고있는 힙스터의 모습 또한 자신의 속성이기도 하다.
상상력을 발휘해 제이미의 생각을 추론해보자면, 제이미는 조쉬의 작품을 정말 재밌게 봤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영감을 준 여러 작품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 (중요도가 얼마나 큰 지는 모르겠지만) 조쉬의 작품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정하고 생각하면 조쉬 또한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한심한 인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도 훌륭한 한 사람의 감독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조쉬가 깨달은 것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처럼 젊고 '쿨한' 사람이 아니고, 그저 늙은 아저씨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삶의 신조와도 많이 닮아있는데, 나는 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항상 되뇌이곤 한다. 아주 작은 성취로도 나를 엄청난 사람으로 포장하고자 하는 수많은 유혹에 맞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하루하루 죽어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생각보다 훨씬 건설적이어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겸손함을 갖추고 누군가에게 미움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또한 내가 해내는 모든 것에 계속 채찍질을 해서 더 완벽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을 담은 글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고백을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믿지 못한다. 그럴리가요, 저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요.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나도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항상 이상한 기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