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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Jan 16. 2019

당신이 나의 오직 하나 남은 선택지라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 2003>

1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요즈음의 트렌드가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개인주의 경향이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쩌면 개인주의란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사회에 있기를 거부하고, 내가 행복하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의 사회로 편입하길 원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들의 소망이 뒤틀려 발현된 게 아닐까.


 고독이란 어려운 감정이다. 슬픈 일이 생길 때는 슬퍼지고, 기쁜 일이 생길 때는 기뻐지지만, 이 고독이란 녀석은 언제 튀어나올지 좀처럼 예측할 수가 없다. 혼자 오랜 시간 지내더라도 무리에 어떤 방식으로든 소속되어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좀처럼 들지 않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나 혼자 우주의 먼지처럼 동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고독은 갑자기 몰려온다. 심지어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도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이 감정은 어떤 식으로 해결하면 좋은 걸까? 벌써 몇 년째 나의 곁을 지키는 이 감정은 아마도 내가 느끼는 감정 중 가장 해묵은 것이지만, 아직까지도 어떻게 하면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사라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두 주인공은 고독에 몸부림치는 이들이다. 극중에서 확인해주지는 않지만, 아마도 본토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익숙했을 이들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극동의 이국에서 마음 둘 곳 없이 쓸쓸하게 표류한다.


 나는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운명처럼 만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게 로맨스 영화의 문법이지만,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랑(혹은 사랑을 많이 닮은 어떤 관계)은, 어떻게든 어떤 사회에 편입되고자 하는 생존으로써의 몸부림이다. 고로 이것은 로맨스가 아니다.



2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홀로 떨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낯선 경험은 아닐 것이다. 나기 전부터 나를 알고 있는 부모와의 이별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만남들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우리는 항상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을 만들어가며 산다. 예를 들면, 학창시절 첫 입학했을 때, 혹은 학년이 올라 새로운 반에 갔을 때, 문을 열고 처음 들어가면 아는 얼굴 대신 모르는 얼굴만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어색함을 머금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만 한다. 괜찮은 친구를 만나 아무 무리 없이 무리에 녹아 들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때로는 어떤 곳에도 속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다른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전혀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내가 아는 것들을 이들이 모르고 이들이 아는 것들을 내가 모를 때, 분명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너 소피아 코폴라 감독 알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딸이거든. 대부 감독 말이야. 그 감독 영화가 괜찮더라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조금 갸우뚱했는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는 완전 끝내주던걸. 빌 머레이가 그런 연기도 할 줄 아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 2003년도의 풋풋한 스칼렛 요한슨도 볼 수 있고 괜찮던데, 그 영화 봤니?’ 따위의 이야기는 분명 누군가에게는 외국어처럼 들릴 것이다. ‘나는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걸.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지나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본 경험이 한 번쯤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영화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까지 나에게 있어 영화란 홀로 즐기는 나만의 취미였다.


 그런 상황에 닥칠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하는 척을 해야 했다. 단지 무리에 섞이기 위해 흥미도 없는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은 꽤 고역이다. 새로운 취미가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축구나 농구 이야기를 할 때면 도통 관심이 생기지가 않던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더 랍스터>에서는 자기에게 맞는 짝을 찾기 위해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서 한 남자는 코피가 자주 나는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코피를 낸다. 웃어야 하는 장면이지만 도무지 웃음이 나질 않는다.



3


 밥과 샬롯의 상황은 훨씬 절박하다. 한물 간 스타인 밥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 밥이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밥에게 아는 척은 하지만 그와 진짜 대화를 나누는 이는 하나도 없다. 샬롯은 결혼한지 2년 된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왔지만, 남편은 항상 출장 중이라 샬롯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다. 게다가 만리타향 일본어는 한 마디 알아먹기도 힘들고, 그들이 말하는 영어 단어도 몇 번이나 고쳐 들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지구촌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언어의 장벽은 아직도 높다. 바벨탑이 세워진 이래로 나뉜 언어의 장벽은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는 과학의 발전 속도로도 아직 넘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개발 이후로 정말로 얼마 있지 않으면 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예측만 있을 따름이다. 얼마나 언어의 장벽이 드높은지 간단하게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들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Lost in translation>이라는 심오한 제목은 한국에 들어오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싸구려 느낌이 풀풀 나는 제목이 되었다. 직역하자면 ‘번역 속에 길을 잃다.’라는, 딱딱한 느낌이 되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조금 더 세련된 제목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외국인과 만나 대화하며 언어가 통하지 않아 답답해 본 적이 있다. 짧은 외국어로 우물쭈물하며 손짓으로 발짓으로 의미는 통할 수 있지만, 화장실이 어디 있는 지나 물어보면 다행이지, 속마음을 내보일 정도로 깊은 이야기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이렇게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답답할지는 상상도 가질 않는다. 말이 통하는 사람도 간간히 있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다. 밥을 알아보는 서양인들은 그저 그를 신기한 사람으로 쳐다볼 뿐이고, 하룻밤 파트너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게 아닌, 마치 벽에다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음성 언어의 교환을 대화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런 압도적인 고독 앞에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물에 빠진 조난자가 작은 섬을 찾은 것처럼 반가운 일이었을테다. 세상에서 가장 절박하게 헤엄치다 마침내 뭍에 발을 딛는 순간, 간신히 숨통이 틔게 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빠져들고 의지하게 되는 것은 잘 마른 하얀 천에 물감이 젖듯 순식간일 수밖에 없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서로가 운명의 상대로 느껴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4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이런 외딴 섬 같은 곳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로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샬롯은 밥을 보며 한물 간 할리우드 스타 늙은이로 보았을 것이고, 밥은 샬롯을 여느 젊은 여자아이 중 하나 쯤으로 보지 않았을까. 충분히 더 드라마틱해질 수 있는 이 각본을 풀어내는데 있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이런 현실을 자꾸 드러내며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는 것을 택한다. 두 남녀는 미친 듯이 사랑에 빠져 서로를 탐닉하기보다, 서로의 필요의 한계를 알고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다. 손끝이 마주치는 것 또한 조심스러워하며, 작별의 키스 또한 조심스레 마주치며. 이 영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이런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밥과 샬롯은 현실을 무시하지 않을 정도로 현명하다. 그들은 도쿄라는 작은 섬나라의 도시에서만 인연을 이어갈 뿐, 섣불리 나중을 기약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애틋한 마음을 모두 담은 마지막 장면의 키스와,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속삭임으로나마 감정을 전해볼 뿐이다.

 

 어떤 성숙한 이들의 이별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수많은 로맨스 영화는 짜릿한 시작과 끝나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만, 좋은 시작이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처럼 좋은 끝은 또한 아름답다.

이전 05화 한 때 하나였을, 감정의 부서진 조각들을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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