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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새벽 하늘의 가짜 달을 손으로 지우며.

<종이 달(紙の月), 2014>

1


 실없는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영화가 재미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 전날 밤을 새고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갔을 때, 잠들면 재미가 없는 영화고 잠이 깨면 재밌는 영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영화가 재밌다면 전혀 잠이 오질 않는다. 이 기준은 영화의 장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편인데, 아무리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라고 해도 재미가 없으면 잠이 솔솔 온다. 최근 본 영화중에는 <모털 엔진>이 그랬다. 어째서 그런건지 조금 생각해보면 내 기준에서 '재밌는 영화'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고, 끊임없이 생각하다보면 잠이 들 새도 없이 영화가 끝나있기 때문이다. <종이 달>을 볼 때도 그랬다. 여행 전 날, 새벽부터 공항으로 향해야 해서 잠을 자지 않기로 했는데, 새벽 세 시 즈음 몽롱한 눈을 비비면서 틀었는데도 영화가 끝났을 때는 오히려 정신이 또렷했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은행 공금 횡령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잘잘못을 가리고 누가 범인인지 찾는 추리 영화는 아니다. <종이 달>이 주목하는 건 평범한 중년 여성이 어떤 계기로 그렇게 막대한 돈을 횡령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과연 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때때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그 이유 또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서 찾으려 들곤 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싸이코패스처럼 감정을 상실한 인간의 '묻지마 살인' 따위가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사건의 범인은 우리 주위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다. 대체 어떤 일이 있어야 평범한 사람이 상식을 벗어나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걸까. 열 길 물 속보다 알기 힘들다는 한 길 사람 속은 얼마나 복잡하게 꼬여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연약하고 동시에 굳건한가. <종이 달>은 그런 질문을 우리에게 남기는 영화다.



2


 영화가 철학적 딜레마를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다. 딜레마는 대부분 논쟁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소재에 대해 언급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찬반양론이 극명하게 갈릴수록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 애매한 경계선 사이에서 중용을 유지해야만 한다. 너무 조심해서 겉핥기 식으로만 논제를 파악한다면 영화가 심심해지고, 너무 과격하면 영화 외적으로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만듦새가 아닌 소재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가장 지양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는데, 때로는 영화가 다루는 소재만으로도 무조건적인 옹호나 비난을 받기도 한다. 꽤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많은 감독은 그렇기 때문에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주제보다는, 이미 검증된 윤리를 영화의 기조로 가져오곤 한다. 이를테면 권선징악이라는 케케묵은 가치는 아직도 수많은 영화 안에서 변주되고 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사건의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를 포함한다. 원인에서 결과에 이르는 직선적인 구조는 감독이 생각하는 어떤 가치관이나 답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확률이 높다. 감독이 정해놓은 대로 완결된 논리 구조를 감상해야만 하는 수동적인 입장의 관객은 대부분 그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게 되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를 두고 새로운 논제를 꺼내기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종이 달>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주인공의 행적은 어떻게 봐도 범죄자에 불과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관객은 심적으로 그를 응원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심지어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자가 오히려 악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철학 수업의 도덕적 딜레마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유명한 기관사의 딜레마를 생각해보자. 다섯 명을 죽일 지, 한 명을 죽일 지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쉽게 한 명을 죽이는 선택을 하곤 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한 확신은 점점 흔들리게 된다. 이처럼 당연히 범죄자라고 그를 판단하던 관객은, 영화가 진행되며 점점 어느 쪽이 정답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수동적 입장에 놓이는 것에 익숙하던 관객들 또한 능동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그의 선택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가. 그는 단순한 범죄자인가. 이러한 고민을 하는 연습을 통해, '능동적인 관람'에 익숙해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른 영화들에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감독의 사상을 오롯이 받아들이기보다 의심하고 논박할 수 있게 만드는 이런 영화들은 영화 감상의 능력치를 키워준다.



3


 주인공 리카가 횡령을 하지 않는 건 실존주의적 견지에서 볼 때 오히려 스스로를 죽이는 행동이다. 반복되는 무채색의 가짜 삶에 중독된 그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 리카와 대척점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그를 고발한 스미는 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스미는 리카와의 대화에서, 당신에게도 이렇게 큰 돈이 생긴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가 생각해낼 수 있던 것은 고작해야 밤을 새는 것 정도였다. 매일 회사에 나와야 하기 때문에 밤에 깨어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큰 돈이 생긴다는 상상 앞에서, '밤을 새는 것'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자의 인생은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지는가. <종이 달>을 보면서 리카를 응원하게 되는 건 그러므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 수단이나 과정, 혹은 행위 자체를 긍정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리카가 느꼈던 것처럼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은 현대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위기감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리카가 '살기' 위해서 찾아낸 '진짜'는 남을 도우면서 나타나는 기쁨의 감정이었다. 어렸을 때는 저개발국가에 있는 한 어린아이를 도우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노인 고객의 무일푼 손자를 돕는 것을 통해 그는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리카가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생을 유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고, 현대 사회를 뒤덮고 있는 자본주의의 산물인 돈 따위는 그에게 있어 가짜, 환상에 불과하다. 어차피 종이 쪼가리, 어차피 숫자 놀음에 불과한 걸. 나를 구속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진짜가 아닌 가짜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당혹감 속에 비릿하게 묻어나오는 해방감은 <종이 달>이 주는 가장 큰 카타르시스다. 어차피 가짜에 불과한 돈으로 나의 진짜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리카가 아무 거리낌없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계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나의 '진짜'는 무엇일까. 허구로 가득찬 세계 위에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게 하는 나의 작은 땅덩어리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리카가 찾아냈던 '진짜'인 기쁨의 감정 따위는 신기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돈이야말로 그들의 진짜일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일반적인 견해가 아닐까. 그러나 나에게도 그렇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하고 대답하려다가도 약간 망설이게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 따위는 품어본 적도 없다. 그렇게 큰 이데올로기는 나에게 있어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소시민의 품이 나에게 꼭 맞기 때문일까. 이야기를 꺼내놓는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나의 세계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작다. 어쩐지 리카에게 마음이 간다. 그녀의 '진짜'가 물질이 아닌 감정이었던 것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감정을 붙잡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두 손에 꽉 잡으면 언젠가는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매 순간 느끼는 감정들을 소중하게 관찰하다 보면 무언가 보이지 않을까. 오늘의 나는 이 곳에 이렇게 기록해본다. 생각이 달라질 게 분명한 조금 더 나중의 내가 다시 이 문장을 읽을 순간을 기대하면서.



4


 리카는 의자를 던져 창을 부순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리고, 꽉 막힌 방에 사람 몇 명은 너끈하게 나갈 만한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온 힘을 다해 거리를 달려 내려가는 리카의 얼굴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려있는 것 같다. 숨이 차오르도록 뛰어가는 지금에서야 살아있다는 감정을 가장 충실하게 느끼기 때문일까. 앞으로 남은 길은 외국을 전전하는 도망자의 삶 뿐인데도 불구하고 리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 보인다. 적어도 직접 선택한 길에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이의 모습은 보는 것은 일견 고귀하기까지 하다. 막힌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다른 길이 있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앞으로 그녀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렇지 않겠지, 그러나 그녀는 행복할 것이다. 아니, 이미 행복해 보인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기 위한 리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조금 머쓱해진다. 나의 모습을 새삼 들여다본다. 난 너무 게으르다. 나는 노력하지 않는다.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노력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매일 밤 궁리한다. 내가 가진 어떤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 스스로를 불태우고 싶지 않다. 그냥 많이 놀고 많이 쉬고 많이 자고 많이 먹고 살고 싶다. 이게 나다.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을 절대 비웃지는 않는다. 집요하게 정한 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나에게 항상 자극이 된다. 막힌 벽을 뚫고 나아갈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걸까? 항상 궁금하다. 언젠가는 나도 내 한 몸 불사를 각오를 할 목표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이런 하찮은 생각들을 하고 살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리카는 막힌 곳을 뚫기 위해 창에 의자를 던졌지만, 아마도 나는 지금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길게 뻗은 복도에서 벽에 몰래 구멍을 파내어 안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달려가기가 귀찮아서 최대한 몸을 숨기고 쉬기 위해서 말이다. 내 앞은 막힌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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