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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사랑은 사랑이지 요술지팡이가 아니야.

<블루 발렌타인(Blue Valentine), 2010>

1


 가끔 우리는 너무 확신에 찬 약속을 듣곤 한다. ‘정말’이나 ‘진짜’ 따위의 의미 없는 부사가 붙을수록 오히려 믿기 힘들다는 건 살면서 몇 번 겪다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새삼 지금에 와서야 다시 깨달은 것은, 적어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말을 하고 있는 순간까지는 적어도 거짓말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이다. 끝에 가서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정말 그걸 지킬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사랑의 약속은 대부분 이렇다. 아니, 사실 항상 그렇다. 어떤 사랑의 약속이 발화하는 그 순간의 뜨거움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까. 심지어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헤어지지 않는 데 성공한 노년의 부부마저도 지금의 사랑이 처음 맹세하던 그 순간만큼 뜨거우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젓지 않을까. 사랑은 대체 뭘까? 하찮은 감정의 부산물일 뿐인지, 혹은 모든 것을 이겨낼 궁극의 열쇠인지, 이것을 정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언젠가 변하고야 말 것이라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누구나 동의하는 진리에 가깝다. 어쨌든 사랑은 그 기반을 쉽게 변색되고 썩어지기 마련인 격동하는 감정 위에 두고 있고, 로맨틱한 온실에서 나와 차가운 현실과 마주치는 순간 힘없이 스러져버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령, 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사지가 불구가 되고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크게 망가지고, 뇌사 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맨다고 해도, 난 널 사랑해! 라는 고백은 꽤 감동적이지만 당연히 거짓말일 것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모든 역경이 끝나고 난 후, 영원히 함께하고 난 그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들이 대부분 비극으로 그려지는 것도 이런 맥락일 테고, 결혼이라는 사건을 결혼 전과, 후에 각각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생각해보면, 내 주장에 조금 힘을 실을 수 있을 것 같다.


 비유하자면 예쁜 드레스 같은 존재가 아닐까. 너무 예쁘고 보기만 해도 행복하고 꼭 한번 입어보고 싶지만, 결혼식 이후에도 평생 그 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거추장스러운 장식과 불필요하게 큰 부피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난 너를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차례가 돌아오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게 우리의 모습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랑은 드레스의 화려한 장식처럼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야 만다.



2


 신디와 딘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 왔다. 그러나 지금의 둘을 있게 만든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역사는, 같은 사건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다른 생각과, 다른 입장의 차이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작은 다름이 쌓여서 지금의 이 순간을 만든 것이다. 신디의 가족은 예전부터 파탄이 나 있었다. 신디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화를 내기만 하는 집안의 군주로써 군림했고, 가정 안에서 신디가 마음을 놓고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그녀의 할머니 뿐이었다. 부모의 잦은 싸움과 위계질서를 보고 자라며, 언젠가는 그들도 사랑을 했었겠지 하는 생각에 신디의 사랑에 대한 불신은 이미 극에 달해 있다. 그래서 신디는 대학생 때 만난 남자친구도, 딘에게도, 함께 연애는 하지만 사랑을 한다고 할 정도로 쉽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딘의 부모님은 어렸을 때 이혼해서, 둘 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어른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기르며 자라온 딘은 혼자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 잘 안다. 딘에게 있어 사랑이란 자신이 혼자 되지 않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아이에게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듬뿍 나누어주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딘은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관계가 끝에 다다랐을 때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그리고 그들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이런 성장 배경에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관계에 더 이상 사랑은 남지 않았고, 의무만 남았다고 느끼는 신디는 딘에게 쉽게 관계를 끝내자고 한다. 사랑 없이 자신을 키운 자신의 부모님의 관계처럼 될까 두려워한다. 딘은 자신의 아이에게는 그런 유년시절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신디는 그런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딘의 노력하겠다는 진심어린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끝을 선고한다. 


 영화를 받아들이는 관객으로써 우리는 어느 한 쪽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각자의 배경이 어떤 쪽을 더욱 닮았냐에 따라서, 우리는 신디의 입장에서, 딘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신디의 입장이라면 딘은 무책임한 로맨티스트이고, 딘의 입장이라면 신디는 매몰찬 냉혈한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계는 누구에게나 각자의 시선으로 비추기 마련이고, 그들은 다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 라는 선언은 핑계에 불과하다. 나의 지금까지의 과거가 이런 모양을 하고 있으니 미래도 같은 모양으로 계속되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언젠가는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자신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존재의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득 내가 가장 미워하는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고야 마는 나의 모습을 본다. ‘나’라는 존재가 단지 내가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들의 합에 불과하다고 내 자신을 한정 짓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분신으로만 존재한다. 


 신디는 그렇게나 자신의 가족을 저주하며 살아 왔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보듬어 준 딘에게 마음을 열고 결혼까지 이르렀지만, 결국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고압적인 태도로 딘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단지 조금 로맨틱하고 싶었을 뿐인 딘은 신디의 이런 모습에 큰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인정해야 한다. 나를 부정하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을, 부족한 점까지 완전히 인정하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후에야 나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3


 사랑은 과연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 이 퍽퍽한 인생에서 사랑이란 단지 한 순간의 마약처럼 우리의 뇌리를 마비시켜 행복하게 만드는 한 순간의 즐거움에 불과한 것일까? 전쟁 같은 하루하루에서 사랑은 사치에 불과할까? 우리는 <블루 발렌타인>의 아픈 사랑을 보며 어떤 결론을 내려볼 수 있을까?


 나는 사랑에 그 이상의 가치를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며, 사랑을 통해서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더 얻으려고 하는 것은 사랑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신뢰이자 오인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수많은 잘못된 일들,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 헤어지면 죽겠다는 협박, ‘사랑하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사랑하니까 상처 받을까 봐 숨긴 거야.’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착각하여 오용할 때 일어나는 비극이다.


 또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관계에서 사랑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부딪히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를 이겨내는 데 있어서는 사랑 뿐만이 아닌 또 다른 개념의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내가 아무리 비싸고 예쁜 보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보석을 먹어서 배를 채울 수는 없다. 금전적인 문제, 거리의 문제, 우리 둘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 가치관 차이의 문제, 또 수많은 다른 문제들을, 사랑의 이름으로 해결하려 들기 시작하는 순간 무언가 뒤틀리고 꼬이기 시작한다. 애초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만병통치약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지.


 사랑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대접을 가지고 올바르게 대우받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애꿎은 비난의 화살을 사랑에 돌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신디는 사랑을 과소평가해서 포기해 버렸고, 딘은 사랑을 과대평가해서 다른 차원의 문제들을 사랑으로 해결하려고 들었다. 그리고 둘 다 실패했다. 우리 또한 수많은 나의 잘못들을 사랑이 부족한 탓으로 넘겨짚고 사랑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데 헤어져?’, ‘우리의 문제들이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탓이 아닐까?’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질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진짜로 신경 써야 할 부분에 적절한 해결 방법을 적용하여 문제에 알맞은 실제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 ‘진짜 문제’가 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우리의 문제도 어쩌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어차피 아무리 이런 깨달음을 얻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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