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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Feb 09. 2019

삶을 표류하는 부유물과도 같은 우리.

<립 반 윙클의 신부(リップヴァンウィンクルの花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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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이 슌지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는 여러 일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특히 2012년, 주연 배우인 쿠로키 하루를 처음 만난 감독이, 그녀의 이미지를 토대로 소설을 집필하고, 그것을 토대로 영화화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립반윙클의 신부> 이야기다. 그만큼 이 영화 안에서의 쿠로키 하루가 배역을 맡은 나나미의 이미지는, 우리가 쿠로키 하루를 볼 때 느끼는 그 이미지와 거의 동일하다. 단어로 정의해본다면, ‘모호함’이라는 말로 표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당당함, 요염함, 단아함, 따뜻함, 차가움, 순수함, 능청스러움 등 수만 가지 감정이 보인다. 이런 다양함은 그녀의 연기 선에서도 비롯될 테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그녀의 마스크에 담겨 있다. 배우로써 이것은 굉장한 자산이다.


 쿠로키 하루의 이미지를 꼭 닮아 있어, 막 동이 틀 무렵의 희끄무레하고 푸르스름한 시간이 잘 어울리는 이 영화는 서사도 캐릭터도 개연성도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확실한 것들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그렇게 좋은 평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하지만 관객에게 받아들여지는 지점은 동시에 바로 그 모호함이다. 현실 세계에서의 우리는 조금 비약해 모두 모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쿠로키 하루가 연기하는 나나미는 영화 속 캐릭터이지만, 그 모호한 점을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모습을 쉽게 투영해서 볼 수 있게 만든다.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의 주인공 ‘립 반 윙클’은 술에 취해 낮잠을 곤히 자고 일어나니 20년이 훌쩍 지나 있었고 자신은 백발의 노인이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우리는 어느 곳에 발을 디디고 서 있어야 할 것인지, <립반윙클의 신부>는 우리에게 그 해답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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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조금씩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간미가 옅게 느껴지는 것은 아야노 고가 연기한 아무로라는 인물이다.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나나미를 도와주는가 싶더니만 역시나 나나미를 이혼하게 만든 흑막임이 드러나고, 그런가 싶더니 또 결국 나나미를 끝까지 도와주고 함께 있어준 것은 아무로였다. 그래서 결국 이 인물은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조금 김이 새는 해설을 붙이자면, 감독인 이와이 슌지는 이 아무로라는 인물을 하나의 캐릭터라기보단 나나미가 의지하는 SNS,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감정을 가진 인격체라기보다는 AI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고 보면 AI가 영화에 등장하는 영화는 대부분 AI가 인간처럼 되고 싶어 감정을 가져서 문제가 되는데, 인간이면서 AI처럼 완벽히 감정이 배제된 체 기계적인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아무로라는 인물은 꽤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여태껏 이렇게까지 감정이 배제된 인간 캐릭터는 본 기억이 없는데, 각설하고. 어쨌든 감독의 해석을 따라 영화를 본다면 감정이 배제된 아무로라는 캐릭터가 착한 쪽이냐 나쁜 쪽이냐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른바 ‘입체적’인 캐릭터라서 착했다 나빠졌다 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오히려 훨씬 인간적인 변화에 가깝다. 이 인물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평면적으로 선악이 거세된 존재다.


 재미있는 것은 관객에 따라 아무로를 보는 관점이 바로 그들이 SNS를, 사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보는 관점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현대사회의 편의가 극대화된 서비스를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나에게 불이익으로 다가올 가능성 또한 존재하지만, 어쨌든 사용하는 우리가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마법 지팡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로가 그래도 선악을 굳이 따지자면 선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아무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대 사회의 극대화된 편의성이 사람과 사람이 마주칠 때 생기는 그 오묘함에 대한 고전적인 가치를 해치고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치관에 대한 논의까지 불러일으키는 아무로라는 인물은 여러모로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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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나미는 부유하는 삶을 산다. 기간제 교사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교사 생활의 연장도 될 것 같아 보이지가 않는다. 친구도 딱히 없어 보이고 다른 사람과 교류라곤 SNS상에 생각을 털어놓는 게 전부다. 남편도 그 곳에서 만났다. 결혼을 하면서 이 남자에게는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의 계략으로 남편에게도 얼마 있지 않아 이혼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나온다. 그리고 다시 만난 ‘립 반 윙클’, 마시로와도 함께 저택에서 지내지만 얼마 있지 않아 곧 그곳에서 나오게 된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만의 작은 집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남의 집을 떠나 나의 집에 오는 이야기.’다. 도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매번 이번엔 정말 이 사람에게 정착하겠다는 확신을 가지지만, 결국 부유하던 나나미가 잠잠히 가라앉을 수 있게 된 때는 홀로 자신의 작은 방안에 조용히 앉아 햇살을 맞는 순간이었다. 나의 시선으로 남을 볼 때, 나는 그들을 곧잘 어떤 단어들을 통해 정의하곤 한다. 분명 그들에게도 내가 보는 그들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라고 자신의 자아를 완벽히 찾은 사람일리가 없겠지만, 그들이 이미 완성된 무언가가 되어 있다고 착각하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앞에 섰을 때 쉽게 남에게 의지하게 되어버리는 까닭은 아마도 거기에 있다. 그러다 나는 용기있는 사람에게서 소심함을, 착한 사람에게서 잔인함을, 진중한 사람에게서 가벼움을, 현명한 사람에게서 어리석음을 본다. 내가 기대하던 그들의 모습에 정반대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짐짓 당황하며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하지 못해서 남에게 의지했는데, 이 사람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어떤 인물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나의 인간이란 그 안에 우주를 품고 있으며, 유구한 역사와 복잡하게 꼬인 모든 이야기들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격 따위로 누군가를 재단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 남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고,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도 할 수 없다. 이 말은 꽤 선문답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어떤 진리를 담고 있다. 내가 오롯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 아닐까. 이러나 저러나 가족도 친구도 결국엔 불완전한 타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리는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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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졌다고 해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써의 자아를 완벽히 확립하고, 휘둘리지 않을 굳센 인간으로써 거듭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나미는 아직도 많이 불안하며, 또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제야 처음 시작을 할 출발선 앞에 선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극 초중반의 나나미처럼 남에게 끌려 다니는 답답한 삶을 살 정도로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닌 사람일지라도, 살면서 수많은 문제들에 부딪히고 깨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그러다 어느 날 밤에는 불안한 나머지 베개를 끌어 안고 눈물을 끅끅 흘리기도 하겠지. 뭐든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방금 적긴 했지만, 사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은 놀랍게도 무엇도 아니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되기는커녕 무어라도 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면서 살아간다. 하나의 단어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자신감은 좋지만 자만심은 독이다. 그것도 우리를 완벽하게 파멸시킬 수 있을 만큼 아주 강력한.


 나는 때때로 궁금해진다. 항상 자신에 차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자신에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분명 그 사람들에게도 절대로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역경이 있을 텐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깊은 바닷속에 잠겨 우울해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이겨낼 수 있었던 걸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긍정의 힘일까? 결국 긍정적인 마인드와 절치부심이야말로 인격 도야와 모든 성공의 핵심인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어서,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는다. 안 되면 되게 하라니. 안 되는 건 안 되니까 안 되는 건데 어떻게 되게 하냐.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게 아닌 무엇이 아닌지 알아가는 삶을 살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없는 게 뭔지. 나는 얼마나 무능하고 작은 존재인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할 수 있는 쪽부터 세면 평생이 걸려도 세지 못할 것 같아서. 모호하지 않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아마 나는 평생 모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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