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뒤를 보고 앞으로 걷는 자들.

<걸어도 걸어도((歩いても 歩いても), 2008>

1


 언어는 불완전하다.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의 불완전성에 탄식하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언을 남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불완전한 언어로 어떤 것들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게 될 바에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일테다. 이러한 사례는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되곤 한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진심을 전하고자 할 때다. 할 수만 있다면야 내 심장이라도 꺼내어 보여주고 싶은데, 진심을 담은 나의 언어는 초라할 따름이다. 분명 네가 이런 내 생각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데, 내가 열심히 고른 비루한 단어들을 듣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네 표정을 볼 때, 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고야 만다. 하지만 이미 망쳐버린 조각에 되살린답시고 찰흙을 덕지덕지 바르면 더 흉물스러워지는 것처럼, 진심은 아득히 멀어진다.


 때문에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 때마다 우리는 침묵하는 법을 배우나보다. 입을 여는 대신 우리는 눈을 열기를 택한다. 말하는 대신 보는 것을 택한다. 조금 더 넓게 시야를 열고, 차마 언어로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시그널을 읽어내자. 눈가의 주름이 조금 흔들린다거나, 비릿하게 올라간 입꼬리라거나, 손짓이 평소보다 소극적이라거나, 그런 것들을 시야에 넣게 되면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대화에서 우위에 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는 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말들을 하겠지. 짧은 문장 속에 하고 싶은 의미를 꾹꾹 눌러담고 말이야.


 그렇게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고 살아간다.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심은 마음 속으로 더욱 꽁꽁 숨겨대면서, 알아주길 바라지만 알 수 있게 하지는 않으면서.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십수년 이상 쌓이면 어떨까? 눈치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는 사이라면 어떨까?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다는 건 꽤 멋진 일일수도 있지만, 때로는 비극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각자의 마음 속에서만 벌어지는 더 잔혹한 비극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바로 나의 가족이다. 태어날 때부터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나의 낙인이자 자랑, 사랑이자 흔적, 모든 것이자 아무 것도 아닌,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항상 무거운 마음이 된다.



2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들은 이미 다 큰 어른들이지만 사실은 하나도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들같다. 그렇게 젠 체를 하고 있으면서도 아주 사소한 말들에 아직까지도 상처를 받고 툴툴대는 모습들이 그렇다. 과묵한 아버지는 내가 벌어서 지은 집인데 왜 '할머니 집'이라고 부르냐고 볼멘소리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일화에 등장하는 게 형이 아니라 나였다고 굳이 정정하려 든다. 의도가 그렇지 않았음에도, 그렇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닐텐데도 이들에게 중요한 건 서로가 아닌 나 자신이 듣고 느끼는 감정이다.


 별 것도 아닌 게 별 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거리가 이렇게나 가까워서일테다. 작은 집 안에서 부대끼는 이들은 의도치 않게 서로가 서로에게 비벼대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작은 생채기도 생기기 마련이겠지. 진작에 그걸 들어 엎었으면 좋았을 걸, 이 정도 상처는 상처도 아니라는 생각만 가지고 어른인 척을 하다보니 이들은 아파도 솔직하게 아프다고 말할 줄을 모른다. 가족이 아무리 가까워도 결국은 타인에 불과하다. 한 번 살아가는 세상, '나' 이외에는 전부 타인에 불과한걸. 남인데도 불구하고 남이 아닌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다보니 이들의 관계에는 깊은 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원한 평행선이라면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이 거리감을 인정하지 않으니 넘어가려 할 때마다 있는 힘껏 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다면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데 사랑해야만 한다면, 그 감정은 이도 저도 아닌 곪아터진 무언가로 변하고야 만다. 그렇게나 서로를 아끼는 척만 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실 밖에서 보면 웃길 따름이다. 이 가족에 소속되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아직 '어른들의 대화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료타의 배다른 아들은, 줄곧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이들의 대화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3


 이 평범한 가족이 지금처럼 겉돌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구심점의 부재에 있다. 사실은 가족의 장남인 준페이가 이들을 모두 엮어주는 역할이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고 없다. 하지만 가족 중 어떤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인정하는 이가 없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아들을 그리워하고,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인정하지 않고, 아들은 형의 그림자에 아직도 가리워 있다. 그의 부재를 그나마 제일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딸 정도인데, 그는 이미 이 가족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저 자기와 자신의 새 가족이 살아갈 방법에만 신경쓸 따름이다. 있는 힘껏 서로에게 부딪혀도 진심이 전해질 수 있을지 미지수인데,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모두 이미 비워진 장남의 자리다.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곳을 바라보고 걷고 있는 이들의 간극은 영원히 메워지지 못한다. 무한히 뻗은 평행선이다.


 과거의 망령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내가 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것들. 가졌었으나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들. 지나왔으나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길들. 앞으로 몸을 향하고 나는 전진할 수밖에 없는데 시선은 자꾸 뒤를 향하게 된다. 나는 이것보다는 좀 더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좀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심지어는 나를 기억하는 지나간 이들이 떠올리는 건 모두 과거의 나일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그런 것들은 못하는데.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하지.


 망각은 그러므로 축복이다. 매일을 치열하게 살다보면 우리는 언젠가 지나온 과거를 잊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좀처럼 과거의 기억이 나에게서 떠나질 않는다. 생각하지 않으려면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기억은 점점 선명해진다. 어떻게 잊어야 하는가. 어떻게 떨쳐내야 하는가.


 준페이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요시오 군은 매년 그의 기일이 되면 이 곳으로 찾아온다. 앞에서는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주지만 가족 중 그를 반기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치를 떨면서 혐오했으면 했지. 이제 슬슬 그를 보내주는 게 어때요, 하는 질문에 어머니는 완강히 고개를 젓는다. 앞으로도 계속 오게 할거야. 나는 과거에서 살아갈거야. 도저히 준페이를 놔줄 수가 없어. 스스로 망각의 축복을 거부하고 과거에 살아가기를 택하는 자의 모습은 추하지만 인간적이다. 어머니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