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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Jan 15. 2019

한 때 하나였을, 감정의 부서진 조각들을 쥐고.

<데몰리션(Demolition), 2015>


 한 때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까지도 유효한 고유명사로 존재하는 '힐링' 열풍에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나의 부정적이고 우울질인 성격이나 사회부적응자같은 요소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이 '힐링' 열풍이 무엇이든 결함이 있거나 상처를 받은 등의 불균형한, 비정상적인 상태에 놓인 것을 다시 정상궤도로 돌려놓아야만 한다는 사회의 병적인 집착처럼 느껴졌다. 어떤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완벽주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자기 뿐만이 아닌 남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려고 한다. 심지어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이런 경향은 오히려 어딘가 병이 있는 사람의 행동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감정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정적일 경우에도 여전히 그렇다. 이러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변화의 시작으로 기능한다. 내가 지금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거부하고 무작정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려 드는 것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에게서 무시당한 우울, 슬픔, 분노, 절망, 좌절, 외로움 등은 마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 복수심을 키워, 언젠가 거대해진 몸집으로 다시 돌아와 우리를 집어삼키려들기 마련이다.


 <데몰리션>은 사실 마스터피스라고 불리기에는 어딘가 조잡하고 난잡하다. 산발적으로 뿌려진 상징들은 끝까지 그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힘을 잃고 만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사용되는 장치들은 작위적이고, 몇몇 장면들은 너무 전형적이다. 일단은 코미디라는 장르에서 풍자의 성격을 띄고 있는 극에서 클리셰의 사용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몰리션>이 이뤄낸 영화적 성취는 탁월하고, 또 명확하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정의하기 힘든 감정의 한 조각을, 스크린 안의 세계에 재현함으로써 다시 한 번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이런 영화이다. 이세계의 추체험에 불과하지만 나의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해 주는 그런 영화. 매번 말하지만 그런 영화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현대인들은 '힐링' 열풍 따위의 맥락에서 보아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그다지 현명하지 못하다. 현재의 나쁜 감정을 좋은 감정으로 바꾸는 데에 집착하고 노력하기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도가 가끔 성공해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잠시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이게 되면, 이들은 그 시도가 성공한 것으로 여겨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여행을 떠난다든지, 집에서 편히 쉰다든지, 그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그 시간 동안 나의 감정들에 오롯이 집중하는게 아닌 잊어버리는 도피의 성격을 띄게 된다면 정말 중요한 문제는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방법은 결국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힐링'이 반복되고 무뎌지는 순간 더 커진 감정들은 봇물 터지듯 터져 마음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우리는 데이비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극 중 데이비스의 감정의 소실은 사회적으로 어딘가 불구가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과 닮은 꼴을 이루고 있다. 데이비스는 매사에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그 이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냉장고가 2주 동안이나 고장난 채로 있게 둔다던가, 아내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하는 태도 따위를 보면 그의 감정의 역치가 이미 많이 높은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사건으로는 그의 감정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을 맞이하게 되자 데이비스의 마음은 결국 부서지고 만다. 그는 무언가 잊어버려서 찾고 있는 사람처럼 기행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나이트 크롤러> 이후로 광인 연기의 정점에 달해다는 것을 재차 증명하기라도 하듯 제이크 질렌할의 미친놈같은 표정과 연기는 그야말로 완벽하다. 기차를 타다가 비상 레버를 당겨 갑자기 기차를 멈춰 버리거나, 주변의 사물들을 나사 하나까지 분해해 바닥에 늘어놓는 모습은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은 그에게 있어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다. 주변 사람들은 아내가 미쳐 정신이 돌아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측은하게 여기지만, 그는 이 과정들을 통해 좀 더 솔직해지고 좀 더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넌 지금 아내가 죽었으니 슬픔을 느껴야 해, 지금은 울어야 해, 지금은 입을 닫고 조용히 해야 해" 따위의 정해진 감정을 느끼는 것은 데이비스에게 이젠 더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데이비스는 마치 아내가 죽은 것이 전혀 슬프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었고 슬픔이었다는 감정을 깨닫는 순간은 이 기행들이 데이비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때에야 비로소 모든 어색한 표정들을 벗어나 진정으로 슬퍼하고 진정으로 행복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데몰리션의 힐링이 다른 것과 차이점을 갖는 지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사회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방법이긴 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극한까지 솔직해지는 이상한 행동들을 통해 데이비스는 상담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상처의 치유가 아닌 진정한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그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가장 어려운 과정인 이 시기를 거치고 난 다음에는, 우리의 상처는 언제 있었냐는 듯 스스로 아물곤 한다.



3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자신의 감정마저 잘 조절하지 못하는 데이비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본 적이 없어 마약에 의존하면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살고 있는 캐런에게 있어 데이비스의 이런 기행은 퍽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억지로 데이비스에게 잠자리는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크리스와 함께 있는 테이블에서 로맨틱한 노래를 틀고 크리스에게 좋은 엄마임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자 크리스가 날린 일침에 캐런은 결국 화를 내고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그도 결국 데이비스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있지만 자기는 데이비스와 친구 관계에 있는거라고, 데이비스의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소리치는 모습은 크리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것만 같다. 캐런은 이제서야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마주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크리스 또한 처음에는 "우리 약쟁이 엄마랑 한번 자 보려고 온 거지?" 따위의 험한 말을 지껄이며 데이비스도 그저 그런 남자들 중 하나로 여기지만, 데이비스의 행동에 그는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데이비스와 시간을 보내면서 신뢰를 쌓고 나자 크리스는 데이비스에게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아저씨는 내가 게이같아?"


 나에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 장면이다. 당황한 데이비스는 무언가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 나이대에 남자에게 흥미를 갖는 것쯤은 괜찮다고 하다가 남자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는 이야기를 듣자, 잠시 고민하더니 일단 게이인 것을 숨기고 여자를 좋아하는 척 하다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큰 도시로 나가서 살라고, 아주 힘들 거라고 말해준다. 계속해서 비정상적인 행동만 하던 데이비스가 크리스에게 여느 꼰대나 해 줄법한 이야기를 해 준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크리스의 표정은 크게 상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도 결국 똑같은 꼰대구나. 하고 느끼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과 삶으로 캐런과 크리스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데이비스였지만 자기가 나서서 무언가 조언을 해 주려고 하는 순간 그는 모든 관계를 망쳐버리고 만다. 더욱이 그 관계를 망쳤다는 것을 크리스의 표정에서 캐치하지 못하는 모습은 정말 여느 어른과 다른이 없는 수준이다. 조언이란 이렇게 파괴적인 속성을 띈다.





 +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인 "데몰리션 (파괴)" 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부수어 버리고 그 본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너무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지만 인류가 발전하며 꼬아 놓은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사회 구조나 인간 관계의 복잡하고 뒤틀린 면을 생각하면 일단 다 파괴해버리는 게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개연성이 크게 중요한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불도저를 사서 자기 집을 밀어버린다든가 하는 장면은 대놓고 코미디에 가깝구나 할 정도로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하지만, 이러한 작위적인 장치들은 적어도 영화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 평범한 로맨스 영화처럼 데이비스가 결국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것 따위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죽은 아내나 캐런, 누구하고도 다시 잘 되는 식의 결말을 내지 않은 것은 굉장히 고무적이다. 어떻게든 누군가와 짝을 지어야만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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