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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Feb 20. 2019

여전히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헤매는 중.

<졸업(The Graduate)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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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쓸 때 뿐 아니라 내 삶에 있어서도, 살아가며 마주하는 수많은 감정의 탐구는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꼽자면 불안함이 아닐까 싶다.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불안함은 나의 인격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분명 긍정적인 영향도 있을테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영향이리라. 겉으로는 유쾌하고 사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나의 태도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감정의 기저에 깔린 불안함이란 괴물이 언제 날뛸지 모른다는 사실은 살면서 겪는 인지부조화의 가장 큰 원인이다. 나는 아직도 이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어찌 되었든 오랜 시간 함께 보낸 세월 탓에 불안함이란 감정에는 일종의 친숙함이 들 정도인데, 그래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이런 감정의 결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테이크 쉘터>라는 작품이다. 소용돌이치는 마음의 문제를 이미지로 구현하는데 완벽히 성공한 이 묘한 작품은 끔찍하지만 매력적이다. 이외에도 다른 많은 영화들이 있을테지만, 같은 감정을 다루는 영화 중 가장 최고로 꼽고 싶은 영화는 <졸업>이라는 작품이다. <테이크 쉘터>가 불안함이라는 모호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졸업>은 그 모호한 감정을 그대로 스크린 위에 재현하는데 노력을 쏟는다. 특히 백 마디 대사보다 더 큰 의미를 품고 있는 첫 씬과 마지막 씬의 더스틴 호프만의 표정은 이미 오래 지난 영화임에도 앞으로 아주 오래동안 회자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을 위대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의 유산이다.



2


 우리의 귀에는 익숙하지만 제목이나 출처 따위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음악이 흐르고 난 뒤, 처음 마주하는 장면은 수족관을 배경으로 멍하니 앉아있는 벤의 얼굴이다. 자신의 졸업을 축하하는 파티의 주인공이니만큼 어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부모의 독촉에 그는 사뭇 절실하게 잠시만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고 애걸한다. 그러나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부모에게 갓 대학을 졸업한 나의 작은 아기의 감정 상태는 그리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웃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벤이 멋지게 등장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비단 부모 뿐만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에게 벤의 감정 상태는 크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읍소하는 벤 그 자신에게도 그렇다. 어쩌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비일상으로 가득찬 벤의 일상은 차마 받아들일 새도 없이 빠르게 변화하고, 벤은 흘러가는 삶의 급류에 저항하려고 하지만 이윽고 자신의 몸을 그대로 맡기고 흐르는대로 이끌려 가고야 만다.


 나를 기다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항상 나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 중 하나인 시간의 흐름을 포함하여, 나의 상태가 준비되었는지 물어봐주는 자는 조금 비약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며칠, 몇 시간, 혹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건은 대부분 부정적인 모양새를 띄고 있다. 나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의 독촉에 못이겨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 세상의 기준은 그러나 진실한 의도보다는 행동과 말로 드러나보이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다. 등을 떠밀려서 벌인 일도 결국은 나의 탓이고, 그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하는 것도 결국은 나 자신이다. 나를 기다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썼지만, 오로지 죄악의 굴레는 끝까지 나를 기다리다가, 절대, 단 한번도 벗어나지 않고 확실하게 나를 파멸시키고야 만다.


 내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너무 복잡해질 때면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쉬어가라는 이야기는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임시방편 따위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조언이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기보다는 가끔은 뒤를 보고 나를 돌아보는 행위는 권고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이다. 잠잠하고 엄격한 시선으로 잠시 돌아보기만 해도 짓지 않았을 수많은 죄들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리 늦었을지라도 어떻게든 책임을 질  수는 있다.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고 나의 삶을 파괴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흉악한 존재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아무리 많이 잃더라도 올바르게 되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3


 나는 이 영화를 최근에 관람했지만, 개봉 당시에 이 영화를 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을 때 많은 수가 영화의 장르를 코미디라고 기억한다고 했다. 블랙 코미디라고 얼버무리기에도 이 영화는 너무 진지하고 심각해서, 당연히 드라마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가끔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 정도로 어이가 없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경우를 맞닥뜨릴때마다 항상 기억하는 것은 찰리 채플린의 대사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만난지 하루가 되자마자 사랑에 빠져, 그녀의 어머니와 불륜 관계였던 것을 스스로 고백했다고 버림받은 벤이, 상대의 동의는 구하지도 않은 채로 무작정 찾아가서 결혼을 하자고 하고, 결국 결혼식장에까지 쳐들어가 신부를 낚아채 도망가는 장면은 코미디든 드라마든 오래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긴 하다.


 즐겨 인용하는 이야기 중에, '인생이 시트콤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시트콤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처참한데 그걸 재밌게 포장해서 이야기할 줄 아는 것뿐이다.'라는 게 있다. 위에 언급한 찰리 채플린의 대사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이중에서도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삶에 직접 제 1 행위자로 참여하는 우리에게 결국 삶이란 비극이라는 것이다. 으레 즐거운 일들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 내에서 벌어지는 것과는 달리 불행한 일은 예상치도 못한 사각에서 눈 깜짝할 새도 없이 갑자기 우리를 덮쳐오곤 한다. 왜 불행한 일은 항상 더 극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하는 원망 섞인 질문에 앞서, 당장 우리에게 닥쳐오는 불행한 일들을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며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물론 개중에 대부분은 우리의 잘못일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지난 과오 때문이든 우연한 사고가 되었든 일단 어떤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난 후에는, 이 복잡한 일을 어떻게 해결해나가는가, 그뿐이다. 사건의 재발 방지도 나중 일에 불과하다.


 나의 이야기를 희극으로 승화해 들려주기를 즐기는 편이다. 덮여 쌓인 비극을 해결하고 난 이후에 마치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재밌게 포장하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의 불행이 재밌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불행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작은 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나의 비극이 희극이 되기를 바라며, 눈 앞의 불행을 찬찬히 정리해나가는 중이다.



4


 시간이 오래 지나고 이 영화에 대해 어렴풋한 기억만이 남아있을 때, 영화의 다른 모든 장면들은 기억에서 사라질지라도 단 하나 기억해야만 할 장면이 있다. 바로 가장 마지막, 신부를 낚아채 행선지도 모르는 버스에 올라탄 뒤, 환하게 웃던 얼굴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변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 한 장면을 위해 영화가 달려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 장면은 인상적이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를 남긴다.


 모든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영화라는 것이 어떤 이의 삶의 일부를 떼어내어 가공해낸 삶의 일부분이라고 한다면, 그 앞이나 뒤의 이야기는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영화를 만든 감독조차 그렇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에 빛나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에 환하게 웃는 얼굴을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그 뒤까지 생각하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다. 이를테면 놀이동산에서 즐겁게 놀다가 체력을 모두 소진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고 긴 지하철과 버스의 환승길에서 관절 마디마디마다 피곤함이 가득 들어찬 때의 내 표정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어코 그 표정을 스크린 위에 올리기로 선택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끝나고 난 후에도 짙은 잔향을 남긴다는 점에서 <졸업>의 엔딩 장면은 마스터피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소를 띄고 보다가도, 마지막 장면을 마주해야만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너무 시리다. 나는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고, 영화를 볼 때면 행복하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잠시간의 행복한 체험을 끝낸 뒤 나는 다시 지난한 삶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때 문득 바라본 거울에 비치는 내 표정을 보았을 때, 깊은 탄식을 내뿜을 수밖에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에도 한참동안 나의 옷의 끝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며, 이 영화는 끝이 없는 불안감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토록 잔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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