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아내의 시점
“와자작, 빠자작.”
참소라 과자를 씹는 소리가 방 안 가득하다.
원, 오랜만에 집에 와서는 안 하던 행동을 다 한다. 과자를 씹는 소리가 묘하게 거슬리면서도, 한편으론 저렇게 편하게 먹는 모습에 찬물을 끼얹긴 싫었다. 나는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잔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간신히 눌렀다. 점심에 밥을 그렇게 맛있게 먹고 나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과자를 먹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잔소리도 좀 미뤄두고 싶었다.
오늘은 네 식구가 다 모였다. 애들이 먼저 전화해서 점심 같이 먹자고 했다. 아들은 약 한 달 만에 집에 오는 날이라 더 들뜨는 눈치였다. 요양병원에 있는 남편은 일주일 만에 집에 오는 것이다. 남편은 환자인데도 집에 올 때면 절대 빈손으로 오질 않는다. 늘 그렇듯, 오늘도 매운탕거리를 사 왔다. 마트가 10시에 문을 연다고 해서 어제 미리 가서 챙겨놓았다며, 마치 큰 선물이라도 되듯 까만 쇼핑백을 들고 올 것이다. 매주 먹자니 좀 그렇다는 생각도 들지만, 정성껏 준비해 오는 마음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오는 시간에 맞춰 옷을 챙겨 입고 마중을 나갔다. 버스 정류장 전광판에는 ‘곧 도착’이라는 글자가 반짝였다. 이내 버스 문이 열리며, 남편이 까만 쇼핑백을 들고 내려왔다. 살만 조금 더 붙으면 환자티도 덜 날 텐데, 여윈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까만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건네주고 건네받는 맛으로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아파트 들어가는 입구에 박태기나무 울타리가 쭉 늘어서 있었다. 며칠 전, 우연히 스친 그 나무가 뇌리에 자꾸 걸려 검색까지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알고 보니 이른 봄이면 가지며 몸통에까지 분홍빛 꽃을 잔뜩 달아낸다 했다. 더구나 잎은 사랑표가 아니던가.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마음 한편에서 작은 두근거림이 일었다. 벌써 봄을 기다린다.
그 여운이 꽤 오래갔는지, 공원을 지날 때마다 나무들을 예전보다 천천히,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이 돼 있었다.
오늘은 마침내 발견했다. 아파트 입구를 감싸듯 서 있는 박태기나무 울타리. 남편에게 먼저 알려주고 싶어 서둘러 말했다.
“여기 봐요. 내년 봄 되면 얼마나 예쁠까.”
말을 하면서도, 이미 내 머릿속에는 분홍빛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은 앙상한 가지뿐이지만, 겨울을 지나면서 눈길도 주지 못한 사이에 어느 날 문득, 온 나무가 꽃으로 생생하게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집을 나서면 가장 먼저 맞아줄 색, 하루를 밝히는 분홍의 기척. 그 계절을 맞을 내 표정까지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년을 기다린다는 건, 딱히 큰 희망을 품는 일도 아니지만, 이렇게 작은 봄 하나를 마음에 심는 일만으로도 삶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나무 한 그루가 알려 준 내년의 약속이, 어느새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남편이 아침 일찍 가져온 매운탕거리는 곧장 손질해 초벌로 끓여 두었다. 부엌에 국물 끓는 냄새가 은근히 감도니 집 안이 금세 포근해졌다. 점심은 딸이 수육을 배달시켰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오래 살아온 집에서 식구들이 모여 밥을 먹는 듯한 기분이었다. 딸은 재택근무 중이라 점심시간에 잠깐 얼굴만 보러 온 것이고, 아들은 오늘 오프라 한가하게 합석해 주었다. 평일 한낮에, 네 식구가 둘러앉아 뜨끈한 국물과 고기를 앞에 두고 웃으며 밥을 먹는 순간이 이렇게 귀한 줄 새삼 알게 되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 맞는 첫 평일의 여유, 그리고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찾아와 함께 밥을 먹어주는 이 일상. 이게 바로 복잡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작은 행복의 한 단락이 아닐까, 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점심 후에 남편과 공원 산책을 나왔는데 가게를 찾아 들어간 남편. 무슨 필요한 것이 있나 하고 밖에서 기다렸는데 어이가 없었다. 눈에도 띄지 않는 참소라 과자를 사 들고 나왔다.
“이런 딱딱한 걸 왜 샀어.”
입이 심심해서 샀단다.
“당신이 이런 걸 먹어도 되냐고.”
좋았던 마음은 이렇게 무참히 없어져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