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아내의 시점
2025.11.22.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한자리에 모였다.
점심도 함께 먹고, 저녁까지 같이 먹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보기 어려웠던 딸과 이렇게 연달아 두 끼를 함께했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별것 아닌데도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다. 자식들과 가까이 사는 친구들이 “오늘도 딸이 들렀다, 손주가 잠깐 왔다 갔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 나는 부러움이 먼저 앞섰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소소한 일상을 나도 누리고 있다.
저녁을 먹고 딸과 손녀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갔다. 남편은 오늘 밤은 집에서 자고 갈 거라고 했고, 아들은 이틀을 묵고 간다고 한다.
좁은 집인데도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차니 괜히 더 넓어진 듯했다. 집안이 오랜만에 시끌벅적해졌다. 그 분위기에 젖어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해야 할 말도, 하지 않아도 좋을 말도 스르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대화가 점점 커졌는지, 아들이 힐끗힐끗 눈치를 준다. "좀 조용히 하라"는 그 눈빛이 우스워서 나는 더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시끄럽고 북적한 하루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은, 한 해 중 가장 가족다운 하루인지도 모른다.
남편한테 침대를 내주고 나는 거실로 나왔다. 남편이 요양병원에 있은 후로 한 번씩 집에서 잠을 잘 때 같은 침대를 쓰는 게 이상했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는 거실 소파에서 잔다. 남편은 자기가 잠들고 나면 침대에서 자라고 하지만 혼자 자는 게 몸에 배여서인지, 남편의 거친 숨소리가 마음에 걸려서인지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물론 여태까지 인식하지 않았던 나의 잠버릇이 남편한테 민폐가 되지 않게 하는 배려도 들어 있다.
그래도 남편이 집에서 자고 가는 횟수가 늘수록 우리는 더 할 말이 이어져 갔다. 아침밥은 어제 허연 매운탕이 남아서 한 번 더 먹었다. 나도 모르게 내 그릇에 고춧가루를 넣는 것도 잊은 채 허연 매운탕을 먹었다. 남편은 나더러 왜 고춧가루를 안 탔냐고 물었다. 이런 매운탕 먹는 것도 이야깃거리로 우리는 재미있었다. 인생 뭐 별거 있냐고 하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이런 사소한 삶이 인생인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난 시간에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은근히 ‘오늘 점심은 뭘 해 먹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점심 약속을 잡은 모양이었다. 남편은 원래 사람 사귀는 데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금세 스며드는 성격이다. 요양병원 근처 갑장 계모임에도 어느새 이름을 올렸다고 했다. 오늘이 바로 그 모임 날이라며, 미국에 있는 딸 집에 다녀온 분이 며칠 전에 귀국해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집에서 점심을 먹고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을 텐데, 부랴부랴 준비해 나가야 하는 일정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남편 목소리엔 오랜만에 사람들과 어울리러 가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남편은 ‘친해지려고 노력한다’는 표현보다는 그냥 자신이 편하게 행동하는 편이 낫다고 늘 말해왔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남편이 아마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여름 내내 바둑을 두러 나갈 때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두서너 잔씩 베풀었다고 했다. 어떤 날은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가기도 하고, 그러니 같이 바둑을 두던 이들도 자연스레 번갈아 커피를 사고 점심을 사고 하며 정이 오갔다고 했다. 대단한 선물도 아닌데도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건 늘 이런 소소한 대접들이다. 그 작은 배려들이 쌓여 어느새 ‘정든 사람들’이 되고, 또 그렇게 하루의 일정이 조금은 바쁘고 조금은 따뜻해진다.
나는 그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남편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 누구라도 외로움이 고개를 들기 마련인데, 남편은 오히려 그 틈을 새로운 인연들로 채우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내 머릿속의 ‘점심 메뉴’ 고민도 슬며시 사라졌다. 옷을 바꿔 입고 갈 거라고 얇은 바지를 입고 온 남편이다. 겨울바지를 입히고 사위가 겨울 채비로 산 방한복을 입혔다. 바둑 두러 가실 때 입으시라고 했다. 이곳의 바람은 마산의 바람과 결이 다르다고 했다. 그렇게 든든한 옷으로 바꿔 입으니 건강했던 남편이 된 것 같았다.
오늘은 남편의 빈자리를 느끼며 혼자 천천히 챙겨 먹어도 괜찮겠다. 그가 점심 식탁을 다른 이들과 함께 채우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오전의 작은 걱정쯤은 다 사라진다. 다시 적막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