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아내의 시점
지난주 토요 장에서 뻥튀기를 샀다. 남편 간식거리로 괜찮지 않을까 해서이다. 장터 한쪽에서 ‘뻥’ 하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어릴 적 동네에서 말없이도 사람들을 모이게 하던 그 풍경이 떠올랐다. 하얗게 부풀어 오른 쌀과 옥수수가 한 봉지 가득 담겨 나오는 모습이 왜 그렇게 든든해 보였는지. 남편도 분명 좋아하겠지 싶었다. 요양병원 갈 때 가지고 가야지 하고 거실 한쪽에 두었다.
딸이 와서 보고는 웬 뻥튀기를 이리 많이 샀느냐고 했다. 세 봉지나 되는 봉투를 들어 올리며, “이걸 다 아빠한테 줄 생각이야?” 하고 웃는다. 나는 남편이 좋아라 할 모습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조금씩 먹으면 되지. 이런 거 좋아했잖아.” 그때 딸은 표정을 바꿔 말했다. 설탕이 들어 있어서 아빠 혈당에는 좋지 않다고. 하루 먹는 양을 정해서 먹게 하자고, 그래야 마음 놓고 드릴 수 있다고.
나는 그 순간 잠시 망설였다. 어쩌면 남편과 나 사이의 시간은 이제 ‘조금씩’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앞세워야 하는 시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엔 좋아하는 걸 원 없이 먹어도 되는 사람이었다. 아침상 위에 김치찌개든 멸치볶음이든, 맛있다고 하면 더 담아주는 일도 흔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이든 조심스럽다. 너무 많이 웃게 해도, 너무 많이 걷게 해도, 너무 많이 먹게 해도 안 되는 시간. 그 가운데에서 기쁨은 한 움큼씩, 약처럼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혹시 많을까 싶어 세 봉지 중에 한 봉지만 가방에 넣었다. 남편의 손에 닿았을 때 주머니에서 꺼낸 사탕처럼 반가운 기분만큼만. 남은 두 봉지는 조용히 집에 두었다. 먹지 않고 보관하는 간식이 이렇게 마음을 누르는 줄 몰랐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그 말을 그저 겸손이나 절제의 덕목으로만 이해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 말이 우리의 삶을 조심스럽게 감싸는 보호막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다 채우고 싶은 마음을 절반쯤 접어두고, 남은 절반으로 서로를 안심시키며 살아가는 시간. 뻥튀기 세 봉지 중 한 봉지만 들고 병원으로 가는 길, 내 마음 역시 부풀어 오르다 살짝 가라앉는 그 적당한 지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병원비 계산도 해야 해서 남편더러 먼저 휴게실에 와 있으라 했다. 긴 복도를 지나 휴게실 문을 열었을 때,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남편 혼자 앉아 있었다. 어쩐지 텅 빈 공간이 남편만을 강조하는 듯했다. 창밖으로 겨울 햇빛이 길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빛 속에 남편은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니! 그런데 차림새가.”
그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남편은 희멀쭉 웃으며 멀뚱히 나를 보았다. 병원복을 꼭 자기 몸이 아닌 누군가의 것을 빌려 입은 듯, 말라붙은 옷이 괜히 몸을 조이고 있었다.
“아니, 옷이 왜 그래. 너무 작은 걸 입고 있잖아.”
남편은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아, 실내가 더워서 여름옷을 입었더니 그래.”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데, 그 모습은 어쩐지 마음을 콕 찌른다. 마치 본인 옷이 아닌, 남루해진 어떤 사람의 껍데기를 잠시 빌려 입은 것 같았다. 그 순간, 오래전 읽었던 시집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남루한’이라는 말. 당시에는 그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 오래 붙들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낱말을 내 글 속에 넣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처음 쓰게 된 대상이 남편일 줄은 몰랐다.
남편은 머리를 긁적였다.
“옷이 뭐 어때. 편하면 됐지.”
나는 괜히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래도, 이게 뭐야.”
말끝이 흐려졌다. 꼭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항암 치료로 잃어버린 살과 기운이 옷 사이로 드러났고, 그 빈틈이 마음까지 스며들었다. 남루함은 천이 닳아 해진 옷감이 아니라, 사람의 속살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남루함’이라는 말로 시를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말은 허물어진 어깨선과 헐렁한 바짓단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사람을 조금씩 조금씩 닳게 만드는 방식을 담는 단어였다.
그런데 지금, 남편 앞에서 그 단어는 더 이상 시적인 상상 속 단어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과 함께, 현실 같은 무게를 가지고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