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비

암 환자 아내의 시점

by 복덕


아침 산책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집에서 무일 하게 지내는 터라 굳이 바쁜 출근 시간대에 엘리베이터를 함께 탈 필요가 없다. 학생들이 등교하고, 어린이집 아이들까지 다 지나간 뒤에야 나는 사랑이의 목줄을 챙겨 나선다. 그러면 세상은 이미 한결 고요해져 있고, 햇살이 부드럽게 번져 든다. 그 햇살 속에서 가을은 매일 새로 나를 맞아준다.

길가에는 낙엽이 발끝에 와닿고, 느릿한 바람이 나뭇잎을 뒤적이며 가을의 노래를 들려준다. 어쩌다 운이 좋은 날이면, 황톳길 산책길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친다. 서로 안부를 나누고, 잠시나마 따뜻한 온기를 건넨다. 그렇게 하루의 문턱이 열린다.


남편도 요즘은 아침 일찍 전화를 하지 않는다. 예전엔 아침마다 “잘 잤어?” 하며 전화를 걸어왔는데, 지금은 그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나도 이젠 일일이 전화를 걸어 참견을 줄이는 편이다.

남편은 아프면서도 여전히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다. 눈앞에 있으면 나는 그냥 못 본 체 지나치질 못한다. 약은 먹었는지, 음식을 챙겨 먹었는지, 잔소리처럼 쏟아내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니, 그만큼 참견할 일도 줄어든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걱정은 남았지만, 대신 마음속에는 묘한 평온함이 깃든다.


오늘 산책길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양지바른 나무 사이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들려왔다. 그 맑고 가벼운 소리가 묘하게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나는 그늘과 햇살이 반쯤 섞인 길가에 서서, 아이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작은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서로를 쫓고, 넘어져도 금세 일어나 웃는 모습이 얼마나 생기 넘치는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작고 활기찼던 때가 있었던가. 기억 저편이 희미하게 열리며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그때였다. 바람이 살짝 고개를 돌리듯 불어오더니,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던 낙엽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리고 곧, 우수수, 우수수, 낙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햇살에 반짝이며 흩날리는 잎사귀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노랗고 갈색의 잎들이 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고, 그 사이로 아이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번져갔다.

아이들은 양팔을 활짝 벌리고 낙엽을 잡으려 뛰었다. 한 아이는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낙엽을 보고 “와아” 소리쳤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봄에는 꽃비가 내렸지만, 지금은 가을의 꽃비, 낙엽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낙엽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그 빛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 그리고 공기 속에 묻어 있는 가을의 냄새까지, 그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햇빛 가득한 낙엽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의 웃음이 반짝이며 흩어졌다. 마치 세상 모든 즐거움이 그 순간에만 머물러 있는 듯했다.


낙엽 비를 흠뻑 맞고 집으로 왔다. 베란다로 가서 가을 공원을 내려다보았다. 낙엽 비는 그쳤는지 나무의 일렁임이 없었다.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는 여전히 단풍을 달고 있었다. 낙엽 비가 내린 뒤의 나무들은 잔잔히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찍은 사진을 남편한테 전송했다. 작년 이맘때는 코스모스 축제에 다녀왔었지. 기어코 사진사한테 사진을 찍었지. 어색함이 한껏 묻은 포즈를 잡고. 마음속으로 가을꽃구경을 하고 싶은데 도시 한가운데는 넓은 꽃밭이 없을까. 꽃 보고 싶다는 말도 목구멍으로 숨긴 채 오늘은 낙엽 비를 흠뻑 맞았다.


사진을 전송했는데 남편은 밥 먹었냐고 물어본다.

자기는 오늘 삼계탕이 나왔다고 했다. 영양사님의 보양식 특식이란다.

가을을 잘 보내라고, 그런 뜻이 담긴 밥상일까.

나는 대답 대신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 말로 하면 목이 메일 것 같아서.

그는 여전히 병원 밥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맛이 어떻다, 국물이 진하다, 반찬이 짜지 않다. 그런 평범한 대화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하루의 안부가 되고, 마음의 체온이 된다.


창문 밖으로는 어느새 낙엽 비가 그치고 드높은 햇볕이 스며들고 있었다.

잎을 털어낸 나무들이 저마다의 빈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이제는 숨김없이 서로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 우리 같았다.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제각기 다른 공간에 서 있지만

이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여전히 같은 계절을 살고 있다.


남편이 삼계탕으로 기운을 차린다면,

나는 낙엽 비를 맞으며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셈이다.

가을은 이렇게, 우리 둘을 천천히 단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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