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를 마친 지 벌써 한 달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수강 소감 설문도 쓰고 성적표를 받으니 정말 마무리하는 기분이 드네요. 저는 보통 설문을 열심히 쓰는 편이 아닌데, 이번에는 교수님들께 감사를 담아 나름대로 정성스러운 수강 소감과 설문답변을 써보았습니다.
국내에서 파트타임 MBA를 한다는 건 작년 이맘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직 활동에 진전이 없고, 점차 쌓여가는 구직 피로감과 낮아지는 자신감 때문에 그 상태 그대로 구직을 계속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가끔 채용 우대조건에 'MBA preferred'라고 적힌 걸 볼 때면, 아마도 실제 업무에서의 경력이 더 중요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직 활동에서 괴로운 일들이 늘어갈수록 '나도 MBA라도?'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저도 MBA를 할 거라면 조금 더 젊은 나이에 해외에서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MBA를 마쳤다 하더라도 스스로 뜻이 분명하지 않은 다음에야 결국 일하는 데 별 좋은 점이 없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하는 것은 무슨 좋은 점이 있나? 심지어 국내 학위 학비도 싸지 않고 (낮은 이율의 학자금 대출이 되기는 합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과의 저녁시간을 맞바꿔야 하는데?
하지만 한 가지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신규사업 기획이네, 개발이네 하면서 누구도 답을 알기 어려운 과정을 힘들게 겪어왔는데, 이제 그 일들을 다시 찬찬히 돌아보며 정리하고 소화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향기로운 강의실, 이론의 의자에 앉아서 교수님과 학우들이 함께 짚어보는 현상과 결과는 얼마나 힐링되는 것일까... 이렇게 말하니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면 분명히 지난 경험을 정리하고 성숙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양하고 폭넓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이직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습니다.
운이 좋게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좋은 학교들이 있어서, 두 곳에 지원하고 합격하였습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입학하면서부터는 후회 없이 즐겁게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꽤 신나는 곳입니다. 특유의 학교 분위기에다 다양한 배경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경력자의 모임' 그 이상의 시너지가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참고가 될 만한 삶의 이야기를 읽거나 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곳에서는 표현 그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책 한 권인' 듯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다양한 관점을 가진 학생들의 발표와 질의응답을 듣는 것이 유익합니다. 산업계를 작게 학교에 옮겨 놓은 것 같아, 여러 분야의 동향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시작하는 여세를 몰아, 첫 학기에는 수업도 들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회계와 재무 같은. 과목은 필수과목이 아니었다면 수강신청도 안 했겠지만, 막상 수업을 듣게 되자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껏 살아온 시간이 쌓여서, 꼭 제 업의 분야가 아니어도 회사에서 접했거나 관심 있었던 내용이. 많더라고요. 마케팅 수업을 들으면서는 강의 내용과 예전의 경험, 의사결정 같은 것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서. '그래 역시 그건 잘못된 거였어!'라든지 '원래 어려운 거구나...' 하는 한풀이를 혼자서 밀도 있게 해 보았습니다. 어떤 과목이든지, 저에게는 퇴근 후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내려놓고 마냥 유익한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자 배움이 귀해지고 시간이 귀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수업을 성실하게 듣게 된 것 같아요.
학교 생활의 영향에 더하여, 일에서 한 발짝 물러서게 되자 처음엔 이직 그 자체가 당면과제였던 것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이젠 같은 값이면 사람과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에 제 시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아마 예전이라면 기업 관련자의 강연을 듣고 '저 회사 좋다. 저기서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했을 법한데, 이제는 그런 생각보다는 저 회사는 어떤 가치를 실천하며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 궁금한 마음이 더 큽니다. 한 학기의 MBA 생활이 저에게 자유를 선물해 준 걸까요? 덕분에 삶의 한가운데에서 잠시 멈춰 길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너럭바위 같은 것을 가지게 된 건 분명합니다.
그래도... 학교 생활은 좋지만 학교를 안 가는 게 더 달콤하네요. 2학기를 기대하며 당분간을 행복하게 즐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