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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는 마음 Apr 23. 2022

나는 무엇인가?


 당신은 누구인가를 보통 영어로 Who are you?라고 하지만 가끔 What are you?라고 할 때도 있다. 뉘앙스는 좀 다르다. Who are you? 는 여러분이 흔히 알듯이 상대방의 이름이나 직업 등 개인 정보를 묻는 반면에, What are you?라는 건 당신이란 도대체 어떤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냐? 어떤 집단에 속하는 걸로 분류될 수 있냐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인지 외계인인지 괴물인지 물을 때도 'what are you?'를 쓴다. 스포츠에서 당신은 어느 팀 팬인지를 얘기할 때 상대방에게라고 묻는다면 맥락상 'what are you?'는 대방은 어느 팀의 팬인지를 묻는 것이다. 또 국적 이야기를 할 때 'what are you?'는 국적을 묻는 것이다. 때로는 큰 차이 없이 혼용해서 쓸 때도 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또는 무엇인가? 내가 가진 이름이 나인가, 직업이 나인가, 내 생각이 나인가, 내 몸이 나인가, 내 경험과 기억이 나인가, 내가 어떠한 집단에 속해있느냐가 나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나인가?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나라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이겠지만 개인에 따라서 각 요소의 중요도는 매우 다를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세상에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지점을 정확히 알아야 미래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정확히 설정할 수 있고, 목적지까지 나아가는 경로가 명확히 그려진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출처 : pixabay



 자신의 삶에서 방향타가 되는 자신만의 신념이나 철학이 없다면 우리는 쉽게 표류하고 방향성을 잃게 된다. 그냥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서 좋아하고, 남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쪽 방향으로 정처 없이 흘러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그러다 삶의 종점 가까이에서 어느 날 문득 공허함과 불안감을 느끼며,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라고 한다면 큰일 아닌가?


  물론 집단이 추구하는 방향을 따라가는 것은 안정감을 주고 위험에 덜 노출될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행에 따르고 옆집이 이렇게 하면 우리 집도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절벽을 향해 질주하는 레밍 떼들도 똑같은 생각으로 선두를 따라 달리고 있을 것이다.



레밍 떼


 또한 나는 누구(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심오한 질문 중 하나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진리를 향해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도 쓰인다(많은 명상이나 참선에서의 주제나 화두가 '나는 누구인가'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기보다는 오히려 방황하며 낭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매우 경제적인 행위이자, 자신의 정신을 깨우는 매우 가치 있는 행동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이 이 글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주려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럴 자격도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개인에 따라 답이 다를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우리 각자가 삶을 통해 깨우쳐야 할 숙제인 이 질문을 상기시키며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우선 가장 쉽게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직업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보통 무엇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직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일상적이지 않은가. 특히 한국은 자신의 직업에 헌신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자신의 직업이 정체성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퇴직 후에 많은 분들이 갑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시고 상실감으로 방황하신다. 나는 내 직업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영어를 가르치는데, 이 직업이 싫어서가 아니다. 직업은 내 생계를 유지하게 해 주고 자본을 축적하게 해 주며,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기회를 준다. 또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나는 좋아한다. 다만 현재 직업이 내가 되어버린다면 앞으로 더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역량을 마음껏 펼 수 있는 가능성에 한계를 만들어 버리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스스로 만든 새장에 갇히고 싶진 않다     출처: yestobuy.com. au



  내 이름이 나인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도 있듯이 사람들은 이름을 세상에 떨치고 후세에 남기고 싶어 한다. 유명한 건축물에도 이름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름이 자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름이 정말 나인가? 죽어서 이름을 남겨봤자 사람들이 그 이름을 안다고 나를 정말 아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 건 말건 내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겠는가?



 내 몸이 나인가? 몸은 내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중요한 동반자이다. 하지만 내 몸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사라진다 해서 내가 정말 훼손되거나 변하는가? 몸이 그런 변화를 겪는다 할지라도 내 정신이 나를 그대로 인정하는 한, 나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예전 내가 몸이 아파 고통 속에 신음할 때 몸은 나의 전부였고 건강만 회복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누구 못지않게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요즘의 나는 그때 생각과는 달리 건강 이외에도 많은 것을 추구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한 때는 몸이 나의 전부였지만 이제는 몸은 나의 일부이고 다른 많은 것이 내가 되어 있다.



사지가 없는 닉 부이치치를 보면 몸은 작지만 그 마음은 정말 큰 사람이다. 나에게는 그가 엄청나게 큰 사람으로 보인다. 몸은 나이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다.



                                                             닉 부이치치



 아무래도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정체성은 우리가 여태까지 해온 수많은 경험들과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나는 이러저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신감 넘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삶의 피해자가 되어 웅크리고 있을 수도 있으며 자신이 스스로 만든 새장에 갇혀 날개를 펴지 못할 수도 있다. 어릴 때 들었던 여러 가지 칭찬이나 비난에 영향받아 그러한 사람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는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것도 똑같은 사람일지라도 전혀 다르게 기억될 수 있는 과거다. '밴티지 포인트' 같은 영화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 여러 사람이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기억했을 때 누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객관적 기억이 없다면 과연 객관적인 현실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과거는 내가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수많은 과거에 대한 해석 중에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놓았다. 과거에 대한 해석이 철저히 자의적이라면 똑같은 과거의 사건이라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그 결과 긍정적인 현재의 나가 있을 것이기에.



 과거에 있는 트라우마도 그냥 단순히 부정하고 저항한다면 더 끈질기게 내면에 버티게 된다고 한다. 상처까지도 포용하고 '그 당시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거야'라고 자신을 용서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그 상처에서 치유되는 길이고 더 나은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러면 내 생각과 감정이 나인가? 이 둘은 아마 정체성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종교나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싸우기 쉬운데 종교나 정치는 강한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켜 신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념이 바로 자신이니, 그 신념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부정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부정한다고 생각하니 격렬히 반발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과거 경험의 주관적 해석에 기반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좋았거나 나빴던 경험들이 현재 일어나는 생각의 토대를 이룬다. 그러 과거에 마냥 생각을 조종당할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꿈으로써(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꿈으로써) 과거의 경험도 치유되고 개선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도 인생에서 쓰라린 경험을 많이 했다. 자기가 세운 애플에서 쫓겨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복귀해서 애플을 화려하게 경영난에서 회복시킨다. 그는 인생은 수많은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의 점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 모르지만 돌아보니 그 모두가 현재의 나를 있게 하는 점들이었다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일시적인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진정한 의미는 한동안 시간이 흘러봐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브 에커의 '백만장자 시크릿'에서 말하듯 생각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은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자동 운항장치로 조종되는 비행기처럼 생각나는 대로, 감정이 솟아오르는 대로 휘둘릴 것이 아니라 생각의 정원에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돌봐야 한다. 또한 섭취하는 정보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양질의 정보 위에 의식이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올바른 생각과 깨어 있는 의식에서 좋은 감정이 자라고 그 결과 좋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요소들이 합쳐서 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인마다 어느 것에 비중을 더 두느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나라는 정체성이 어쩔 수 없이 환경과 경험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경험과 생각으로 만들어진 내가 일순간에 바뀌기는 어렵다.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을 보잘것없다거나 초라한 존재로 여기고 절망하고 있다면 그건 단지 선택의 문제라는 걸 말하고 싶다. 만약 그러한 함정에 빠져 있고 오랫동안 부정적 감정에 중독되어 있다면 먼저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정체성에 잘 중독이 된다. 내가 예전에 원인 모른 질환으로 몸이 아팠을 때 그랬다. 자기 연민과 신에 대한 원망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뀌기를 결심해야 한다. 불굴의 용기와 인내로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꿔나가야 한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현재의 자신을 재해석해야 한다. 거기에서 새로운 미래가 가능성을 드러낸다. 


   아인슈타인도 말하지 않았나. '어제와 똑같이 살고 있으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 어차피 나라는 것은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인 정체성이 있다기보다 나라는 정체성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선택의 결과이다. 이제 새로운 나를 정의하고 그로 인한 새로운 미래를 꿈꿔보는 것은 어떤가? 모든 가능성은 자기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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