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일본의 대중음악)
나는 일본 대중문화를 좋아했다. 90년대 일본은 대중문화의 황금기였다.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도 좋았지만 특히 음악을 좋아했다. 일본 가수들은 한 장에 3만 원이나 하는 CD를 통산 수천만 장 팔아치우는 밴드가 몇 팀 나올 만큼 전성기였다. 음반을 수천만 장 판매할 수 있는 음악가는 영미 뮤지션들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드물다. 버블기에 고도로 성장하는 일본 경제에서도 전체 소득세 납부 순위에서 10위권 안에 일본 가수들이 몇 명 있었다는 것이 일본 뮤지션들의 성공을 증명한다. 경제가 고도로 발전할 때 대중문화도 꽃을 피우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정과는 다르게 그렇게 거대한 성공을 거둔 일본 음악가들은 대부분 밴드였다. 일본은 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인 나라다. 그래서 뭔가 색다른 음악을 찾고 있던 록매니아인 나에게는 그 당시의 일본 음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나도 우리나라 가요를 많이 듣기도 했다. 그러나 주로 듣는 음악은 영미권의 하드록과 메탈 음악이었고 그 와중에 일본의 록 음악은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했다.
록의 통제할 수 없는 야성과 충동적인 비트에 아름다운 멜로디를 기막히게 버무려냈다. 매우 대중적인 선율에 적당히 록 음악의 파워를 입혀서 하나의 매력적인 장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도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의 일본 록 음악의 멜로디를 들어보면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선율을 뽑아내는 거지 하며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 음악은 아이돌 음악이 점차 주류를 이루며 침체일로를 걷는 듯하다. 일본의 경제가 활기를 잃어감에 따라 대중문화도 같은 운명을 따르고 있다. 가끔 유튜브에서 일본 아이돌 가수의 어이없는 가창력을 조롱하는 동영상도 몇 번 본 것 같다. 하지만 일본 대중음악의 경쟁력은 밴드 음악에 있다. 수 만개의 밴드 중 메이저 무대에 데뷔해 성공하는 밴드의 실력을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세계를 누비는 BTS를 위시한 한국 대중음악의 위상은 이제 일본이 따라가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나도 일본 음악을 듣지 않은 지 꽤 되었고, 일본과는 불편한 과거사의 문제도 있기에 관심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가까운 여행지로 어디를 갈까 고민 중에 오사카가 좋은 관광지라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로 매년 선정되고, 가르치는 대학생들도 가장 추천하는 여행지로 손에 꼽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사카의 관광정보를 샅샅이 검색했다.
일단 오사카는 '먹다가 죽는 관광지', 미식의 성지로 이름 높았고 여행 경비 또한 매우 저렴했다. 거기다 가까이 교토가 있어 하루의 일정을 빼어 들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그 이름도 찬란한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놀이공원을 사랑한다. 매년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관광지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오사카 주유패스를 구매하면 거의 대부분의 관광지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어 가성비가 매우 좋은 여행인 것이다. 검색은 끝났고 떠나는 일만 남았다.
오사카는 도톤보리 강을 따라 양옆에 형성된 도톤보리 거리를 중심으로 식당과 쇼핑몰들이 줄지어져 있어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일단 글리코 상의 전광판은 오사카의 상징과도 같으니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글리코 상 앞 도톤보리 거리의 엄청난 인파는 겪어보면 사람에 따라 다르게 표현할 듯하다. 나처럼 인파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마치 축제의 거리처럼 보일 것이고, 인파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사람에 떠밀려 가는 것은 서울 지하철에서 이미 충분히 겪었잖아."라고 투덜댈 것 같다.
갖가지 상품을 저렴하게 파는 만물상 같은 돈키호테의 입구에 관람차가 설치되어 있었다. 돈키호테는 상품들이 어지럽게 무더기로 진열되어 있는데, 상품들이 말끔히 정리된 것보다 오히려 무질서한 가운데 원하는(또는 원하지는 않았지만 원하게 되는) 상품을 발견하는 재미를 준다는 콘셉트가 기발하다. 신선한 역발상으로 히트를 한 가게이다. 위 사진에서 가운데 뚱뚱한 남자 조각은 에비스라 불리는데 복을 가져다주는 신이다. 장사가 잘 되길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흥미롭게 보이긴 했지만 타이트한 스케줄로 타보지는 않았다.
도쿄는 뭔가 좀 더 정돈된 국제도시의 면모였다면 오사카는 대충 되는대로 쌓아 올린 잡동사니의 대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잡동사니 하나하나가 무척 흥미롭달까? 아무튼 나에게는 도쿄보다 더 매력적인 도시로 기억된다. 무질서하게 난립한 각종 식당과 상점의 개성 있는 간판들과 관광 인파로 넘치는 거리,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도톤보리 강은 자유로운 이 도시의 매력을 뽐낸다.
덕후들의 성지로 불리는 덴덴 타운에서 고기 덮밥을 주로 파는 고기극장은 가서 먹고는 싶었지만 근처의 규카츠 식당과 고민하던 끝에 탈락되었다.
위의 사진을 찍은 규카츠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느낀 점은 맛이 좀 애매하다였다. 생각만큼 맛있지는 않아서 제2의 선택지였던 맞은편의 고기극장을 잠시 아쉬움을 담아 쳐다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오른쪽 사진의 무섭게 생긴 아저씨 간판 집은 쿠시카츠를 파는 곳인데 쿠시카츠란 각종 튀김 꼬치 같은 것이다. 튀기면 뭐든 맛있다는 건 상식이니 분명 맛있을 것 같았다. 그 옆 커다란 게 모양 간판을 가진 식당도 게 요리로 오사카에서 유명한 듯하다. 이들은 다음에 오사카에 오면 들르리라 기약하고 지나쳤다. 오사카에는 맛있는 식당이 너무 많다. 그 밑에 551 호라이 만두는 다양한 만두를 파는 가게인데 꽤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장해서 숙소까지 가면서 반을 먹고 숙소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다 먹었다.
그다음 약간 익살스럽게 생긴 용 모양의 간판으로 유명한 킨류라멘은 오사카에서 유일하게 내가 두 번 들른 식당이다. 인터넷에서의 평가는 호불호가 갈린다고 했는데 내게는 그다지 헷갈리지 않았다. 우리나라 시장 분위기를 풍기는 식당은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너무 좋았다. 이치란 라멘의 진한 국물보다 킨류라멘의 맑은 국물이 내 취향인가 보다.
숙소와 거리도 가깝고 24시간 영업이라서, 새벽에 잠이 안 오고 출출할 때 다시 식당을 찾았다. 대낮 도톤보리 거리는 사람으로 넘쳐났지만 새벽에 가니 한적해서 오히려 운치가 있었다. 킨류라멘에서 라멘 한 그릇 먹고 나오니 만족감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시 숙소로 오는 와중에 곳곳에 거대한 아이돌 그룹 같은 남성들의 사진으로 도배된 간판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스트바의 스타급 호스트들을 광고하는 간판이었다. 일본이 성문화에 관대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호스트 광고를 하다니. 성에 대해서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열려있는 것 같았다. 새벽이라 퇴근하는 호스트 한 명을 보게 되었는데 마치 연예인을 보는 느낌이 잠깐 들었다. 그만큼 잘생겼다기보다 간판으로 광고하는 사람 중 하나라 생각하니 신기했다는 쪽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빵이 매우 맛있었다. 심지어 편의점의 빵들이 웬만한 우리나라 제과점에 뒤지지 않는 맛을 자랑했다. 평소 한국에선 빵을 그다지 먹지 않았는데 오사카 3박 4일 여행 동안 계속하여 빵을 먹었던 것 같다.
오사카에서 유명한 이치란 라멘도 먹었다. 돼지고기를 오래 우려낸 깊은 육수의 맛은 처음엔 당혹스러웠으나(좀 냄새가 났다) 먹다 보니 적응이 되어 충분히 즐길만했다. 얼큰하게 양념을 해서 먹었는데(개인 취향대로 레시피를 조절할 수 있다) 충분히 매력적인 맛이었다. 인터넷으로 사전에 가장 적당한 레시피를 알아내어 그대로 적어내었는데 꽤 성공적이었다.
내게는 킨류라멘이 좀 더 맛있었지만 이치란 라멘도 고유의 매력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간사이 공항에서 부모님을 위해 인스턴트 이치란 라멘을 면세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도 좋아하셨는데 나중 알고 보니 인터넷으로 한국에서도 인스턴트 이치란 라멘을 주문할 수 있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어쩌다 보니 여행담이 먹방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원래 오사카는 그런 곳이다. 먹다 보면 여행이 끝나버리는.
서민적인 매력이 물씬한 오사카의 추후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