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로부터 온 사랑
경주 예술의 전당과 한수원의 지원 덕에 또 한 번의 호사를 누리게 됐다. 얼마 전에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님께서 경주에 와서 공연한다는 기쁜 소식을 접한 것이다.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이전에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를 우승해서 하나의 현상이 되었던 조성진 님이 경주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할 때는 공연을 관람하지 못해 크게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놓칠 수 없었다. 티켓팅 전쟁에 참여한 날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가 다운되면서 나는 한참을 버벅거려 2층 맨 뒤 표를 간신히 구하였다.
다행히도 부모님과 우리 부부 합해서 4장의 표를 획득했는데 나란히 앉는 자리가 아니라 앞뒤로 앉는 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우리 부부와 부모님 좌석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매진되기 전에 표를 구한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예매를 끝내고 다른 좋은 자리가 있을까 다시 들어가 보니 역시 매진이었다.
역시 조수님의 명성은 아직 식지 않았다일까? 세계적 소프라노의 공연에 목말라 있던 지방 도시의 클래식 팬들은 순식간의 매진으로 그 명성에 화답했다.
이번 공연의 주제는 '비엔나로부터 온 사랑'이다. 화사한 봄에 어울리는 비엔나의 왈츠와 폴카로 구성된 레퍼토리였는데 매우 낭만적이었다. 하프와 큰 북, 팀파니까지 등장하는 풀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2층 거의 맨 뒤 자리라서 교향악단이 잘 안 보일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위에서 조망하니 오케스트라 맨 뒤에서 자기 연주 차례를 기다리시는 하프 주자나 팀파니, 큰 북 주자들을 잘 볼 수 있었고 이것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조수미 님을 보기에는 조금 멀지만 교향악단의 연주를 즐기는 데는 오히려 2층이 유리한 면이 있다고 하겠다. 연주자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들도 한껏 차려입고 오신 분들도 꽤 있었는데 이것이 축제 분위기를 한층 더 돋우었다. 흰머리의 노인 한 분은 아주 스타일리시하게 차려 입고 긴 머리를 위로 쪽지우셨는데 인상적이었다.
조수미 님이 이번 공연에서 부르신 레퍼토리는 대부분 비엔나의 왈츠나 오페레타에서의 노래들로 구성되었는데 낯익은 노래들도 간혹 있었지만 낯선 노래들도 많아 자칫 지루해질까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고 월드 클래스의 명성은 아직 퇴색되지 않았다. 고음의 간드러진 기교와 때로는 숨도 쉬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이어졌던 열창은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장인의 경지라고 할까. 최정상급의 기교를 보여 주신 조수미 님의 노래에 다른 청중들과 함께 나도 열광했다. 나도 내 인생 동안 한 분야에서 저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열망이 움텄다. 오랜 기간 갈고닦은 실력으로 순수하게 그 분야의 최고의 정수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싶다. 조수미 님은 타고난 재능도 있으셨겠지만 공연 중 한곡 한 곡에 모든 열정을 담아 노래하신 부분에서 완벽함에 대한 치열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실력에서 나오는 여유도 좋았다. 노련하게 관객을 이끌어 가는 모습은 유쾌했고 여러 번 갈아입은 드레스도 매우 아름다웠다.
공연의 시작을 열고 중간에 조수미 님의 노래와 함께 연주하거나 단독 연주를 한 프라임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매우 유려했다. 지휘자 최영선 님의 지휘도 인상 깊었고 팬텀 싱어 시즌 3에도 출연하신 테너 장재훈 님도 멋진 외모만큼 좋은 노래를 선사하셨다. 장재훈 님은 다소 소년 같은 수줍음도 보이셨는데 선한 청년임이 느껴졌다.
중간에 프라임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천둥과 번개 폴카'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그동안 많이 쉬시던 뒤 쪽의 큰 북 주자와 심벌즈 주자, 팀파니 주자가 연신 악기를 두드리면 바삐 움직이시는 모습이 재밌었다. 천둥과 번개를 묘사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 제목처럼 천둥과 번개를 묘사하는 것인지에 관해 논란이 있다고 한다. 내 견해로는 단연코 묘사하는 쪽에 표를 던진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제목은 왜 그렇게 붙였고 뒤의 타악기 주자들을 왜 그렇게 바쁘게 만들었단 말인가?
경주 공연이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라고 하셨고 홀가분해서 그런지 마지막에 끝났다고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은 천진난만했다(아래에 그 장면이 첫 동영상에 담겨 있다). 마지막 라데치기 행진곡을 신나게 부르며 약간의 막춤을 시전 하시는 세계적인 소프라노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웃음도 선사하셨다.
아버지께선 평소 공연을 보고 나서도 좀처럼 표현을 잘하시지 않는 분인데 이번 공연은 보고 나서 "참 좋은 공연을 봤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모든 세대에게 어필할 만한 훌륭한 공연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조수미 님의 팬이 되기에 충분한 공연이었고 나에게는 세계 정상급 실력과 태도를 갖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 공연이었다. 또한 조수미 님의 열정과 여유가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예술은 삶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래에는 마지막 앙코르곡 라데치기 행진곡과 함께 짧은 멘트가 수록되어 있으니 현장의 분위기를 같이 즐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