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State of Mind 4)
보통 내가 즐기는 사우스 뱅크의 산책은 내셔널 갤러리를 먼저 들르고 그다음 빅벤과 국회의사당을 지나 런던아이로 향한다. 런던아이를 따라 타워브리지까지 죽 강가를 따라 산책하고 마지막 종착지는 타워브리지 옆에 있는 런던 타워가 된다. 특히 여름이나 봄가을의 템스 강 가는 햇빛이 따스하게 부서지는 템스강의 물결과 사우스 뱅크 주변의 아름다운 명소가 어우러져 산책하기에 완벽한 코스가 된다(하지만 런던 브리지에서 산책길이 좀 헷갈릴 수 있는데 다리 위를 건너 돌아가야 한다).
이 때문에 수많은 연인과 가족, 관광객들이 주말 오후의 한가함을 즐기려 사우스 뱅크를 찾고 저녁에도 시원한 저녁 강바람을 만끽하며 강가를 산책하거나 조깅을 하는 런던 시민들도 많았다. 관광지는 특유의 설렘과 기대가 공기 중에 떠돈다. 들떠있는 관광객들 사이에 축제 같은 분위기를 나는 사랑했다. 그리고 사우스 뱅크는 그러한 흥겨움에 더해 낭만적 분위기가 가득한 장소였기에 런던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아내와 다시 방문한 런던은 겨울이었고 겨울의 템스강은 이와는 사뭇 다른 쓸쓸한 분위기의 애수를 자아냈다.
오랜만에 방문한 겨울의 사우스 뱅크는 수수한 매력으로 우리를 반겼다. 오가는 관광객이 많지 않아 비교적 한적하고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여름이나 봄가을 분위기와는 또 다른 사우스 뱅크의 매력에 젖어 들어 강가를 아내와 거닐었다.
여름에 사우스 뱅크를 거닐었을 때를 떠올리니 새삼스러웠다. 그때는 사우스 뱅크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해서 별문제가 없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인종의 관광객들을 바라보는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즐거움이 있었다.
특히 런던의 여름은 관광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라 런던 시내는 각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터져 나간다. 런던의 여름 날씨는 보통 무덥다기보다 따뜻한 봄 같은 느낌이다(가끔 무더운 날도 있다). 그래서 런던에 다니는 자동차들 중 에어컨이 설치가 안 된 차량도 많다. 일 년 내내 보기 힘든 온화하고 화창한 날씨 때문에 관광객들이 여름에 몰리는 것이다.
런더너(Londoner-런던 시민)들은 관광으로 큰 수입을 올리면서도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에 대해 불평하기 일쑤였다. 특히 여름이면 관광객이 너무 많아 도대체 시내를 다니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런더너 특유의 냉소적인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런던에는 냉소적(cynical)이거나 비꼬는(sarcastic) 유머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신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데 반해 처음 이런 식의 말투를 맞닥뜨리게 되면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런더너들은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은근한 냉소로 자신의 지성을 뽐내는 이들이 꽤 있다. 지적인 냉소는 그 사람의 지성을 돋보이게 할지는 모르지만 감성의 빈곤함을 드러낸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리라.
영국은 코미디언들의 인기는 아주 높은데 인기 있는 스탠드 업 코미디언(마이크 하나 만을 가지고 라이브로 만담을 하는 코미디언)의 경우 큰 스타디움을 관객으로 꽉 채우며 공연하는 놀라움을 안겨준다. 우리나라 같으면 웬만한 인기 가수도 스타디움을 채우기 힘들 텐데 코미디언의 스탠드 업 개그가 그 정도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코미디의 내용은 상당히 수위가 높다. 인종차별, 노인 폄하, 여성 폄하, 남성 폄하, 동성연애자 멸시 등 신사의 나라 국민들이 즐길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 공중파를 타며 실황중계가 되었다. 문화 차이를 실감했다. 우리나라에서 저 정도 수위의 코미디가 나왔다면 언론의 집중포화에 바로 사장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예상외의 이러한 공격적인 코미디나 냉소를 왜 영국인들은 좋아할까?(이런 면도 많이 눈에 띄어서 신기하다는 것이지 영국인은 모두 그러하다는 이야기는 아님을 밝혀둡니다. 친절하고 따뜻하신 분들도 많아요.^^)
부분적으로는 우울한 날씨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는 섬나라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같은 섬나라인 일본을 언급하고 싶다.
실제로 영국인들은 일본을 상당히 좋아하였다. 일본 문화와 일본인, 일본 제품을 사랑하는듯했다. 내가 런던에 처음 도착했을 때 H자 로고가 붙은 차가 많이 돌아다녔다. 그 당시 차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는 처음엔 현대 자동차가 이렇게 많이 돌아다니고 있나 했는데 알고 보니 일본의 혼다 자동차였다. 우리나라에선 다소 보기 힘든 혼다가 런던에서는 대인기였다. 영국인들의 이러한 일본 사랑은 아마도 두 나라가 섬나라인 공통점에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구나 두 나라 모두 드물게 현대까지 형식적으로는 왕정 제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두 나라 사람들은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이러한 정서적인 유사성 때문에 더 끌리지 않았을까?
일본인은 겉으로 하는 말과 속으로 하는 생각이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혼네'와 '다테마에'라고 해서 혼네는 본심을, 다테마에는 겉으로 보여주는 마음(태도)을 나타낸다. 사회적으로 비난받지 않거나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일본인은 혼네를 숨기고 이와는 다른 다테마에라는 가면을 장착하는 걸로 보인다. 일본인이 겉으로 '참 좋은 이야기'라고 얘기하거나 '생각해 보겠다'라고 얘기했을 때 사실은 거절이었다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것도 지역별 차이가 있어서 도쿄나 교토 지역인들은 혼네를 숨기고 오사카인들은 혼네를 당당히 드러낸다고 한다.
영국인들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예기를 들었다(좋다 또는 생각해 보겠다가 NO인 경우를 말한다). 개인적으로 많이 경험한 것은 아니라서 여기에 대해 개인적 경험을 말할 순 없지만 추측건대 이러한 성향은 섬나라인들의 특성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동에 대한 이유도 시중에 떠도는 가설이 있는데 나름 그럴듯해서 소개해 보려 한다. 섬나라는 죄를 저지르거나 상대가 싫어 도망가 봤자 바다에 도달하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그래서 섬나라의 집단이 어느 정도 폐쇄적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개인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공동체에서 분란 없이 잘 지내려면 결국 혼네를 감추고 겉으로 하하 호호 만면의 웃음을 띨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사무라이 시대에는 사무라이가 평민을 특별한 이유 없이 죽이는 것도 허용되던 시기였다. 심지어 사무라이들은 칼이 잘 드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평민을 칼로 베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다. 이러한 잔혹한 시기를 통과해 온 평민들은 혼네를 감추며 더욱 조심했으리라.
일본의 대중문화는 상당한 잔혹성과 선정성을 띠는데 이런 식으로 억눌린 혼네의 반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일본에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어릴 때부터 이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겉으로는 항상 웃고 친절한 얼굴을 하는데 이런 식의 억눌린 분노와 욕망이 간접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국인들의 공격적인 수위의 코미디나 속을 알 수 없는 말이나 행동도 일본인들처럼 폐쇄적인 섬 문화에서 억눌린 감정의 표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하지만 묘하게도 닮은 두 나라 국민들의 성향이나 문화의 유사성은 이런 가설도 일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도 때로는 속마음과 다르게 말하거나 행동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인간은 누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언행일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마음도 말과 일치해야할 것이다. 심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이다.
어쨌든 여름만 되면 관광객에 대해 불평하던 런던 시민들도 코로나로 관광객이 들어올 수 없었던 작년과 재작년 동안 아마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사우스 뱅크에 있는 그라피티로 가득한 공간. 여기에서 런던의 청소년들이 스케이트보드나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놀곤 한다.
사우스 뱅크를 따라 쭉 가다 보면 예전에 버려진 화력 발전소를 현대 미술관으로 개조한 테이트 모던이 눈에 들어온다.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만드는 참신한 발상만큼이나 내부 구조도 신선하다. 입구는 강 쪽에서 들어가는 출입구와 건물 측면에 위치한 주 출입구로 나뉘는데 주 출입구로 들어서면 경사진 바닥에 거대한 빈 공간인 터빈홀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아마 화력발전소일 때 거대한 터빈이 있던 공간이라서 터빈 홀로 불리는 듯하다. 공간의 압도적인 규모가 경탄을 자아내기도 하는데 이 공간에 거대한 예술품이 전시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쓸모가 많은 공간이다(일반적인 갤러리에서는 실내 전시가 불가능한 규모의 예술품이 전시된다). 나에게는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처럼 보였다.
테이트 모던에는 현대 미술의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어 있는데 이 역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피카소, 달리, 잭슨 폴록, 윌리엄 터너, 모네, 몬드리안 등 교과서에서만 보던 화가들의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테이트 모던에 들릴 때마다 누릴 수 있던 예술적 사치는 런던이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주는 멋진 선물이었다. 그리고 유료의 특별 전시 관람 구역도 있는데 런던의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갤러리들이 무료 관람이지만 유료 특별 전시를 병행하고 있다.
러시아의 구 소련 시절 포스터 전시로 보인다. 스탈린과 레닌, 마르크스의 얼굴이 보이는데' 데이비드 킹 컬렉션'이라고 전시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데이비드 킹이라는 분이 수집하신 포스터인 것 같다. 흥미로운 디자인과 함께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 같은 시기라면 이 전시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우스 뱅크의 산책은 다음번 포스팅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