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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는 마음 Jun 26. 2022

내가 믿는 진리

빅뱅(대폭발)     출처 : Wikilmages from Pixabay



수많은 경전에서 우리는 하나라고 한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 의식에 도달하는 것, 모두가 하나인 것을 깨닫는 것이라 한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세상 삼라만상은 우주에서 나왔다. 빈 허공이었던 우주에서 태초에 빅뱅(대폭발)이 있었고 그 뒤 허공의 형태를 취했던 에너지가 구체적인 행성과 별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지구라는 행성에서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자 다양한 생명체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생명체들이 진화하여 인간을 비롯한 갖가지 생명체의 모습을 띠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따지고 보면 모두 우주에서 왔으므로 우리의 근원은 우주이다. 우리는 모두 우주의 자식이자 일부인 것이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부모님의 조상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근원은 우주에 닿게 된다. 우주 안에 생겨난 것은 우주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 삼라만상을 모두 분리된 별개의 존재들로 여기는가? 


아마도 우리가 신체적으로 각자 분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남이 하는 생각을 알 수 없고 남이 느끼는 감각이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남이고 별개의 존재들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동식물이나 사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생각이나 감각, 고통을 알 수 없으니 분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 몸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우리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의 고통을 모두 느낄 수는 없다. 건강한 몸에도 그 몸의 어떤 세포는 탄생하고 어떤 세포는 죽고, 어떤 세포는 건강히 자신의 역할을 하지만 어떤 세포는 병들어 있다. 세포 각자가 서로의 생각과 감각, 고통을 공유하지 않지만 그 모든 세포는 나의 몸을 구성하며 나 자신인 하나로 살아가고 있다. 세포 각자가 의식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각각의 세포는 하나라는 의식이 없이도 전체 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상대의 생각이나 고통, 감각을 공유할 수 없다고 반드시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다른 존재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을 종교에서는 미망에 빠졌다고 본다. 현혹되어 어리석음 속에 빠져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 분리의 의식에서 모든 고통이 탄생한다(육체적 고통은 예외일 수도 있으나 의식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포함시켜도 되리라 생각한다). 이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나 우주와 하나가 아닌 이 한 몸만이 나라고 생각하면 나는 탄생이 있고 죽음이 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 우주는 영원하지만 내 몸은 유한한 것이다. 그러나 우주와 내가 하나임을 깨달으면 내 몸은 없어져도 나의 의식은 우주로 돌아가 우주와 함께 영원하다. 의식이 사는 것이지 몸이 사는 것이 아니다.


원래 나와 남이 따로 없는데 나와 남의 분리가 있으니 남보다 내가 더 잘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남보다 내가 못났다 생각하면 괴롭다. 내가 남에게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사랑받지 못하니 괴롭다. 서로 비교하고 질투하고 증오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모두 미망에서 나온다. 내가 나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내가 나보다 더 잘나야 되고 더 사랑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망상 속에 길을 잃고 고통받는 것이다.


많은 종교 경전에서 말하듯이 나의 이 한 몸만이 내가 아니고,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내 안의 그 의식이 본래의 나라고 생각해 보자. 물론  이 의식이라는 것도 뇌가 있어서 있는 것이고 뇌가 죽으면 이 의식도 없는 것이라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몸이 태어나기 전에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는가? 태어나기 전 시간에 대한 기억이 없기에 의식은 없었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을 잠시 잃어버린 것이라면? 윤회론에서 말하듯 사람의 몸 안에 윤회하는 영혼이 들어와 새로운 인생을 살 때 전생이나 출생 이전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의 의식은 에고(자아)와 다른 것으로 항상 존재해왔던 영원의 의식이다. 에고가 고통스러운 망상에 빠져있을 때 이것을 바라보며 인식하는 또 다른 의식이다.  예를 든다면 내 마음속에서 에고가 '나는 왜 이렇게 항상 재수가 없지?'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일으킬 때 '항상 재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단지 지금 일어난 일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야'하며 알아차리는 그 의식을 말한다-


우리의 신체가 죽으면 모든 것을 인식하는 이 의식도 플러그가 뽑히듯이 끝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후 체험을 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신체의 기능 정지가 반드시 의식의 기능 정지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이 부분은 제 블로그 포스팅 '죽음에 관하여'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즉, 사후에도 의식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식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상상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 원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의식이 없는 영원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면 영원히 존재하는 의식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영원은 에고에 집착하는 인간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는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실제 이 세상에 과거의 일이 지금 존재하는가? 미래도 자신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실제 세상에는 현재 밖에 없다. 현재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과거와 미래가 있으니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실제 세상에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고 현재만이 존재한다면 시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은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 인간이 필요에 의해 시간의 개념을 발명했을 뿐이지 실제 이 세상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관념으로는 영원을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의 관념을 떠난 영원의 우주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다. 영원은 순간과 같다. 


이 생을 살면서 이 세상을 위해 역할에 따라 부여받은 에고(자아)를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다가 신체의 기능이 다했을 때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의식은 에고와 육체의 가면을 벗고 다시 본래인 하나의 우주 의식으로 되돌아간다. 아마도 의식이 이 몸에서 벗어났을 때 원래 자신의 정체성인 우주의 의식(본성)을 찾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의식과 얼마나 합일이 되는지는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왔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아직 살아생전 자신의 가면에 너무 집착한다면 그 가면을 버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본래 의식으로 되돌아가 합일하는 정도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너무나 이기적이고 개체에 심하게 집착하는 마음은  윤회라는 과정이 더 많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우리 생의 끝에 이런저런 70~80여 년의 인생을 살아온 김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에고 또는 가면(페르소나)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하나의 본래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가면을 얼마나 가볍게 홀홀 털어버리고 갈 수 있느냐가 본래 의식과 합일하는 정도를 결정할 수 있다. 얼마나 다른 사람과 자신을 사랑하고 위하며 살았느냐도 본래의 우주 의식에 합일되는 정도를 결정할 것이다. 모두가 하나이니까. 그러나 개인 차이는 있어도 우리 모두는 같은 방향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 본래 의식의 일부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자아라는 가면을 쓰고 신체를 얻어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와서 신체가 허용하는 시간 동안 개인의 역할극을 충실히 한다. 그리그 신체가 수명을 다하면 그 가면을 벗고 무대를 퇴장하여 본래의 의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각 개인은 역할극을 하는 동안은 본래의 정체성에 대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아마도 역할극에 완전히 몰입하려면 본래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 깨어나 우리가 연극 중인 것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연극에서 연기를 훨씬 여유 있게 할 것이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언젠가 내려와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기에 긴장하지 않고 더욱 최상의 연기를 펼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힘들어하는 다른 배우들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삶은 연극 무대이다.   출처 : Mustangjoe from Pixabay



우주의 본래 의식에서 생각해 보면 세상이 완전하다는 것도 납득이 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자.  이 세상의 어떤 존재는 왕으로 살고 어떤 존재는 거지로 살고 어떤 존재는 부자로 살고 어떤 존재는 평범한 노동자로 살아도 전체로 보면 각자가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몸의 눈과 귀, 코와 입, 팔과 다리, 각종 장기 등 모든 신체 부분들은 생김새도 모두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누구도 자기가 잘났거나 못났다는 생각 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갈 뿐이다. 내가 저놈보다 잘 되어야 된다거나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없다. 그냥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하며 조화롭게 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몸의 각 부분들이 서로 저가 잘났다고 싸우고 서로를 해하고 증오한다면 나는 오래 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들은 각자가 하나라는 의식 없이 하나가 되어 산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내 몸에 한정되는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직도 내가 감각이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타인의 몸이나 동식물과 사물들은 절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켄 윌버의 '무경계'라는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과 나의 구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피부의 표면이 경계가 된다. 그러나 나를 정의할 때 우리가 몸을 통해 느끼는 감각이나 고통이 그렇게 절대적 기준이 될까? 


육체적 고통이 아닌 정신적 고통을 생각해 보자. 우리 각자는 몸은 모두 분리되어 있지만 타인의 고통을 볼 때 때로는 우리도 고통을 느낀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의 고통은 때로 우리 자신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왜 당신은 신체가 느끼는 육체적 고통만을 중시하여 나와 남을 나누는가? 때로는 마음의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심하지 않은가? 


우리는 때로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보다 크게 느낀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편안할 때도 가까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우리는 마음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원래 하나라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때로는 이름 모를 타인의 굶주림과 병고 같은 고통에도 아파한다. 그 고통이 원래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인간 중 폭군이나 살인범, 테러범 같은 이들은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죽이고도 잘만 산다. 그들은 어떤가? 이들도 하나인가라고 묻고 싶어질 수도 있다.  우리 몸 안에도 어떤 세포들은 암세포가 되어 우리 몸을 공격하기도 한다. 건강한 세포일 때는 나라고 하다가 암세포로 바뀌면 그때부터 갑자기 적인가? 


건강한 세포든 암세포든 본질은 모두 '나'이다. 인간 중 정신이 미치고 자신에게 너무 집착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파괴하는 행동을 한다. 나는 그가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속으로는 멀쩡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하나인 원리에서 보면 다른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것은 진리에 어긋난 행동이고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해치는 타인이 알고 보면 또 다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영혼은 인식 못 할지도 모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무간지옥(고통이 끝이 없는 지옥)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진흙 구덩이에서 온 생애를 보냈다면 그 사람은 진흙 구덩이 밖의 세계를 모르듯이 항상 고통 속에 살았던 영혼은 고통을 벗어난 세계가 어떤 것일지 모를 것이다. 평생을 무간지옥에서 헤맨 자는 자기가 지옥을 헤매는 줄도, 고통받고 있는 줄도 인식하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지옥이라는 것도 벗어나 봐야 아는 것이다. 겉으로 괜찮아 보여도 그들도 그들만의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몸에 그렇게 집착하지만 몸만이 우리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어느새 몸 이외에 많은 것들이 내가 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나'라고 여긴다. 잠시 떠오르고 사라지는 생각을 붙잡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 생각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엉큼하고 비도덕적일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보통 그러한 찰나의 생각을 나라고 여기며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잡념들은 그것을 붙잡지 않는 한 곧 사라진다. 별 의미 없이 왔다 가는 것들이다.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하고 붙드는 것이 문제다. 어떤 '나쁜' 생각이 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너무 끔찍해서 그 생각을 밀어내려고 집착하면 오히려 그 생각은 힘을 얻어 생명력을 가지고 나를 괴롭힌다. 그냥 생각일 뿐이라고 인정하고 놓아주면 사라진다. 그 생각은 아무 힘이 없다. 그냥 의미 없이 저절로 일어난 생각에 '좋다', '나쁘다'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놓아주기 쉽다. 



때로 문제가 되는 것은 훌륭하다고 판단하는 생각이다. 훌륭한 생각은 내 일부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내가 된다. 특히 종교나 정치에 관해서 우리는 이런 훌륭한 생각에 집착한다. 그래서 종교나 정치를 두고 언쟁하면 사람들은 눈이 뒤집힌다. 그 생각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그 생각이 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서 견딜 수 없다. 정치적으로 골수 진보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종교의 극단주의자이든 지나치게 사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흔히 미망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운다.



그러면 원래 하나인 우리는 왜 이렇게 분리가 되었을까? 이것은 우리의 본래인 우주의 뜻이라 생각한다. 하나인 허공으로 있었을 때는 변화가 없고 우주는 단조로웠다(물론 단조롭다는 생각조차 없었을 테지만). 하나 우주가 갑자기 만상 만물을 창조하고 싶어졌다. 무에서 유로 바꾸고 싶었다(사실 무였던 적도 없다. 허공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형태의 입장에서 한 말일뿐이다).  그래서 빅뱅이 있었고 각종 별과 행성과 생명체가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구에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나왔다. 켄 윌버의 "무경계'는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인간의 원래 의식에는 세상의 만물에 대한 구분이 없다(신생아의 경우 한동안 자신과 남을 구분하는 인식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언어로 각각의 사물 모양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 이름이 실체가 되어 해, 달, 구름, 땅, 바다, 동물, 식물 등 만물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분리된 존재가 되었다. 언어로 인해 수많은 경계가 인간의 마음속에 생긴다. 하지만 원래 세상에는 나무와 흙과 물 등 구성요소 사이에 경계가 없다. 그래서 실제 세상은 '무경계'이다. 


육식동물이 채식동물을 잡아먹지 않는가? 그게 어떻게 하나인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 몸 안을 들여다보아도 세포 중에는 낡고 오래된 세포를 먹어치우는 세포가 존재한다. 삼라만상의 작동 방식은 다만 우주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일뿐이다. 그래서 우주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그것일 뿐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런데 개체의 입장에서는 탄생이 있고 죽음이 있고 희극이 있고 비극이 있다. 우주의 의식에서 보면 탄생과 죽음도 원래 있던 에너지라는 존재가 형태를 취했다가 형태를 벗었을 뿐이다. 좋고 나쁨은 인간의 마음속에서만 있다


D.H. 로렌스의 '자기 연민(self-pity)'이라는 멋진 시가 떠오른다. 


'나는 자신을 동정하는 야생 동물을 본 적이 없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얼어 죽는 작은 새도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참으로 우주의 의식이 아닌가? 그것은 그것일 뿐.



출처 : Valentin Hintikka from Pixabay


필요에 의해서 각 인간에게 에고가 주어졌고 세상에 각종 인공물이 나투어 질려면 에고의 욕심이 필요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없었다면, 열등감과 남보다 잘나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면 누가 미친 듯이 노력해서 발명을 하고 새로운 개념과 예술,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겠는가? 물론 타인에게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에고의 욕심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에고도 욕심도 필요해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에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문제다. '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마음에서 탐욕, 증오, 두려움, 질투, 열등감, 우월감, 피해의식 등 온갖 고통과 문제들이  창조되어 나온다. '나'라는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세상은 고요해지고 완벽해진다. 


'나'가 없으면 '남'도 없다. '잘남'이 없으면 '못남'도 없다. 잘남과 못남의 경계는 자의적이고 상대적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결국 같은 것이다.



음이 있어 양이 있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나'가 없으면 이렇다 저렇다가 없다. 각 개체의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억울한 사연이 있고, 얻음이 있고 잃음이 있고 태어나고 죽음이 있다. 그러나 우주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완전하고 형태가 잠시 바뀔 뿐이고 모든 것이 순환할 뿐이다. 


나를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를 끝없이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이 하나 된 마음으로 살자는 이야기이다.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우하고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우주의 의식이니 그에 맞게 살아가자는 것이다. 우주 의식에 가깝게 살수록 삶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그러나 에고라는 폭군은 우리를 휘두른다. 항상 결핍감을 느끼게 하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한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조차 힘겨워한다. 에고의 입장에선 나는 항상 결핍된 존재다. 



나도 우주이고 상대도 우주다. 나 자신부터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타인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사랑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자. 그러고 나서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자. 사랑하는 것은 처음엔 어려울 수 있다. 마음이 상처받기 싫어 돌처럼 단단해져 있으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노력하자. 조금씩 돌처럼 굳었던 마음은 부서져 내리고 유연함을 찾고 거대하게 커져간다. 나 자신과 타인을 모두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우주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내려다보면 기꺼이 사랑하기가 더 쉬워진다.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더 성장하기 위해, 남을 돕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은 에고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의 입장에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모두 우주이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한 존재고 작은 우주이다.


물론 나도 이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달아 세상과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 부처님처럼 성인들이나 가능한 경지일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치를 깨달았고 마음은 이 진리를 받아들였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진리이다. 


아직도 에고의 힘이 강하여 진리가 아직 체화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유전을 통해 받은 우리 조상들의 삶의 경험을 통해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에고의 마음은 그리 쉽사리 단숨에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에고의 마음은 불교에서 업이고 기독교에서는 원죄이다. 계속하여 노력해서 닦고 또 닦는 것이다. 그것이 성장이고 수도이고 죄 사함이라 믿는다. 우리 각자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만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 됨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이치를 깨닫고 받아들였다면 주어진 인생을 가지고 진리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 모두가 하나라는 마음으로 타인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고, 타인을 해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해하지 않아야 한다. 나 자신도 소중한 우주이다. 남도 소중한 우주이다. 모두 똑같이 아껴야 한다. 


나는 이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다. 내 남은 인생을 이 진리를 위해 살 것이다. 나와 남을 모두 사랑하고 위하며 살아갈 것이다. 내 몸 세포 알알이 박혀 있는 에고의 방해는 멈추지 않겠지만 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으니 빠르든 느리든 그 방향으로 묵묵히 갈 뿐이다. 



세상의 만물 만상이 재각기 타고난 자질을 발휘하고 가장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았을 때가 우주가 원하는 조화로운 모습일 것이다. 온전한 내 모습을 찾고, 다른 사람들도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고 싶다. 앞으로도 에고와 미망에 현혹되어 실수하고 좌절할 때도 있겠지만 괜찮다. 완전한 우주 안에 모든 것은 어떤 모습으로도 이미 완전하다.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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