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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일 Feb 10. 2023

의자에 꽂혔다.

또다른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어머! 산에 다녀오세요?”    

 

배낭을 메고 그을린 채 들어서자, 그녀는 반갑게 맞는다. 5박 6일간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막 울산 도착해서 집보다 그녀에게 먼저 갔다. 의자에 앉으니까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매만진다.     


“제주도 다녀왔어요. 그냥 며칠 걸었어요.”     

“우와! 좋았겠어요. ㅎㅎ”     


“주구장창 걸으면서 의자만 찍었어요. 오늘 아침에는 월정리 해변에서 의자 찍느라 버스 시간을 놓쳐 택시 타고 공항 갔어요. 울산에서 제주 가는 비행깃값이랑 비슷했어요^^”     


사실 어제도 우도에서 의자 찍느라 마지막 배를 놓칠 뻔했다. 더 찍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가까스로 탔다. 원래 제주에 갈 때는 걷는 것 외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런데 중간에 목적이 생겼다. 우연히 글쓰기 단톡방에 올린 의자 사진이 계기가 되었다. 며칠간 찍은 의자만 수백 개이다. 내 눈에는 우도와 월정리의 에메랄드 바다 대신 카페와 해변의 의자만 보였다.  

    

월정리 해변 의자
우도 의자


“저도 그렇게 여행하고 싶어요. 카메라 둘러메고, 그림도 그리고. 그런데 일 때문에 쉽지 않네요. 그래도 이 일이 참 좋아요. 저는 다른 사람들 재밌는 일하는 거 보면 이렇게 생각해요. 와! 멋지다. 나도 해봐야지.”      

“그렇죠. 일해야 잘 놀 수 있는 거니까. 나도 그림을 배워야겠어요. 카메라는 너무 빨리 담겨요. 멋진 풍경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담고 싶어요.”

     

그림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에 새긴다. 대화는 의자로 계속 이어진다. 서로가 생각하는 의자를 시소 타듯 쏟아낸다.

      

누가 앉았을까?

누구랑 앉았을까?

앉아서 뭘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보이는 풍경은 어땠을까?

얼마나 그 자리에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앉았을까? 

    

“제일 신박한 의자는 밭에서 할머니들 허리에 맨 의자에요. 힘들면 바로 앉을 수 있잖아요.”     

“아! 맞네. 나도 텃밭 일하면서 그거 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쪼그려 앉으면 무릎 아파요. 다음에 그 의자 꼭 찍어야겠어요.”

     

사진을 배운 건 꽃 때문이다. 몇 년간 내 눈에 풀만 보였다. 도감을 들고 다니면서 길가에 쪼그려 앉아 누구인가 찾곤 했다. 세상에 잡초란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풀 마다 이름을 불러주었다. 꽃이 더 보고 싶어 산에 갔었고, 오래 보고 싶어 카메라를 샀다. 그렇게 꽃과 산과 카메라가 내 삶이 되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의자가 찍고 싶어졌다. 의자가 보는 풍경을 나도 볼 것이고, 의자가 보낸 세월을 느낄 것이다. 앞으로 당분간 내 눈에는 의자만 보일 것이다. 의자 사진 전시회라는 버킷리스트도 생겼다.     


의자는 삶이고, 세월이다. 의자에서 공부하고, 졸고, 일하고, 쉬고, 먹고, 마신다. 누군가는 노래하고, 누군가는 눈물 흘린다. 둘이서 사랑을 시작하기도, 다시 하나로 돌아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더 크고, 더 높은 의자에 앉으려고 애쓴다. 같은 의자에 앉았다는 것은 동등하다는 의미이다. 의자는 그렇게 인생살이를 보고, 듣고, 알고 있다.

     

“지난달 대화 내용 글로 썼는데 반응 괜찮았어요. ‘그녀는 아내보다 나를 더 잘 안다’라는 제목에 여러 사람이 낚였어요. 오늘도 의자로 대화한 것을 글로 써야겠어요.”     

“호호, 사람들이 낚였다고요. 재미있어요. 댓글도 달렸나요. 보여주세요.”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묻고, 브런치에 올렸던 글을 링크로 보낸다.     

 

“번호따는 게 이렇게 쉽네요.”     

“그러게요. 헤헤. 저는 에세이를 좋아해요. 어떻게 마음을 그렇게 글에 잘 담아내는지 신기해요.”     


“맞죠. 요즘 100명이랑 매일 에세이 쓰는데 다른 글 보면 대단해요. 나는 정보전달 글만 쓰다 보니 핵심만 딱 정리하든요. 근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하는지 신기해요. 어제 친한 사람이 튀르키예 지진을 몇 년 전 울산 지진 경험이랑 연결해서 글을 적었는데 너무 실감 났어요. 내가 썼다면 ‘우르렁 쿵, 지진이 났다. 놀래서 아이들 데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끝’ 그런데 이분 글은 마치 재난 영화를 보는 듯했어요. 

    

어느새 머리 손질을 마치고, 옆 의자로 옮겨 앉았다. 염색약을 쫙쫙 펼쳐 바르니, 머리카락이 짝 달라붙는다. 색이 스며드는 동안 그녀와의 대화를 잊을세라 휴대폰에 재빨리 적는다. 생각나는 대로 키워드를 적은 후, 기억을 되살려 살을 붙인다.   

  

그녀는 옆에서 또 다른 나와 “음~ 예~, 헤헤, 까르르” 연신 즐겁게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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