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일기
■ 꿈의 일기
꿈의 일기를 쓴 적 있다. 사라지기 전에 잔상을 스케치했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그 잊혀진 꿈은 어디로 갔을까. 꿈은 예비할 수 없다. 대비할 수 없는 꿈의 여정에서 겨우 손에 쥔 것은 긴 밤과 감은 눈과 열린 귀. 꿈이 말하고 내가 받아 적는다. 말하지 않아도 나는 받아 적는다. 프로이트가 “꿈은 억압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라 했던가.
★ 1월 29일 오전 4시
나는 조선시대 노비다. 나는 주인의 아들을 죽였다. 칼잡이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머리칼을 파도처럼 찰랑이며 내 주위를 맴돈다. 나는 문 열린 가게로 도망친다. 주인은 나를 다락으로 숨겨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 몇 분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다급함을 눈치 채고 나를 창문 밖 난간 사이에 있는 좁은 틈으로 안내했다.
★ 2월 19일 오전 5시
고령에서 합천을 지나 진주로 가는 길. 눈이 내려 고개 하나 넘는 것도 버겁다. 바퀴에 체인을 감지 않은 앞차가 팽이처럼 빙글 돈다. 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교통경찰처럼 팔을 휘젓는다. 내일은 월요일인데 학교를 못 가면 어떡하나. 한 번도 결석한 적 없는데. 엄마는 눈이 많이 오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단다. 우리는 매트를 깔고 하얀 밤을 보냈다.
《작별》에서 꿈은 중요한 모티프다. 경하는 모르는 벌판에 눈이 내리고 검은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밀려들어오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심 이미지다.
▶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중략)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우듬지가 잘린 단면마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은 검은 나무들과 그 뒤로 엎드린 봉분들 사이를 나는 걸었다. 문득 발을 멈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로 자작자작 물이 밟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어느 틈에 발등까지 물이 차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중략) 시간이 없었다. 이미 물에 잠긴 무덤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위쪽에 묻힌 뼈들을 옮겨야 했다. 바다가 더 들어오기 전에, 바로 지금. 하지만 어떻게? 아무도 없는데. 나한텐 삽도 없는데. 이 많은 무덤들을 다 어떻게. 어쩔 줄 모르는 채 검은 나무들 사이를, 어느새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가르며 달렸다.” (작별, 9-10쪽)
★ 3월 14일 오전 3시
정자에 앉아 그 아래를 관통하는 작은 시내를 바라본다. 아이들은 발목까지 바지를 걷고 물장구를 치며 송사리를 잡는다. 줄무늬 트레이닝 복에 후드를 입은 여자가 운동장을 돌고 있다. 그녀를 따라가다가 운동장 중간의 조회대 근처로 간다. 하얀 천막 아래 간이 탁자 위에 편육과 과일 조각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다. 자세히 보니 외가 식구다. 막내 외삼촌이 쭈그러진 놋쇠 사발에 막걸리를 붓는다.
★ 5월 5일 오전 4시
트레이닝캠프에 참가했다. 철골 구조로 된 건물을 장비 없이 한 사람씩 올라간다. 쇠로 된 난간을 밟고 꼭대기까지 올랐다. 정상에는 강으로 이어지는 미끄럼틀이 있었다. 나는 물속으로 들어간다. 다행히 허리에는 튜브가 있다. 물에 등을 대고 눕는다. 천천히 가장자리로 옮겨가려 해도 제자리만 맴돈다. 구명보트에서 나온 남자가 나를 건졌다. 젖은 웃옷을 벗고 다음 교육 장소로 향한다. 바느질 도구들이 좌판에 펼쳐져 있고 교육이 진행 중이다. 나는 후배의 곁에 앉았다.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었다.
당시의 나를 돌아보면 불안을 공기처럼 껴입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옷은 껴입을수록 춥다. 불면보다는 자다 깨는 것이 더 낫지, 스스로 위로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남편으로, 아빠로, 아들로, 직장인으로, 늘 읽고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역할과 욕망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왕성했던 호기심과 열정이 식고 날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깃털들이 다 뽑힌 채 알몸으로 일상이라는 새장 속에 갇힌 것은 아닐까. 늘 쫓기고 걱정에 흠뻑 젖은 나의 모습을 꿈에서 보았다. 창문이 필요했다. 비친 나를 바로보고 열린 세상을 바라보는 문이 절실했다. 말과 글과 삶이 하나인 세계에서 날개를 펼치고 활공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