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 그런 건 아니다 5 (끝)

다 그런 건 아니다

by 박동민

■ 다 그런 건 아니다


제주 4·3은 공식적인 이름이 없다. 현재까지 가치중립적인 ‘사건’으로 지칭된다. 제주 4·3은 동학농민운동처럼 ‘민중항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제주 4·3은 무장대와 토벌대의 전투나 전쟁이 아니다. 결코 무장봉기가 아니다. 미군정의 지시와 이승만 세력이 정부군을 앞세우고 저지른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이승만이 바라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1948년 4월 3일에 봉기를 주도한 이들은 수백에 불과했다. 그런데 평범한 민간인들이 토벌대에 의해 3만 넘게 희생되었다.


▶ 그때부터 엄마 안에서 분열이 시작된 건지도 몰라. 두 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뒤부터. 갱도 속에 쌓인 수천구의 몸들 중 하나. 동시에, 불 켜진 집들의 대문을 두드리는 청년. 그곳에서 옷을 얻은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사람. 이건 얼른 태워버리십시오. 피투성이 수의를 마당에 남기고 암흑 속으로 달려 사라지는 사람. (작별, 291-292쪽)

▶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작별, 322쪽)


위 구절을 읽으며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관측’을 떠올린다. ‘관측’은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성질을 동시에 갖는 양자 중첩(superposition)을 부순다. 그 이전까지 사실은 확률적으로만 존재한다. 서울의 병원에 있는 인선이 동시에 제주에서 경하와 대화하는 상황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글을 쓰는 나와 거기에서 글을 읽는 당신이 있다면, 여기에 부재하는 나와 여기에 존재하는 당신도 불가능은 아니다. 이것은 문학적 상상이 아니다.


다시 작가의 말을 펼친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의 소설이기를 빈다”(작별, 329쪽) 켜켜이 쌓인 슬픔이 날아가지 않도록 나를 와락 껴안는 누름돌 같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제일 먼저 애도하지 못했지만 가장 마지막까지 슬퍼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 모든 것은 사라져 먼지로 돌아간다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사라지지 않는다, 고 말하면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 있다, 고 쓰면 살아 있다. ‘4·3항쟁’은 살아 있다.




★ 다 그런 건 아니다


바람이 시간을 그린다

보일 때까지 기다리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중산간 움막에 쪼그려 앉은 햇볕, 비스듬히 누운 보리의 허벅지, 봉긋한 오름의 굼부리, 뭍 것은 못 먹는 하귤의 거친 손, 삐걱거리는 경첩에 달린 담팔수의 팔


바람은 그린다

관덕정 앞마당의 가난한 함성을 그린다

그리고 또 그린다


그것들은 시간 속에서 낡고

힘이 빠진다 제구실을 못한다


하지만 다 그러는 건 아니다


바람은 늙지 않는다

빗창으로도 떼지 못하는 전복처럼

변하지 않는 갯바위 같이


뭍 것들에 쉽게 정 주지 않는

밭담 사이사이로

드나드는 바람은


두 눈 가득

별과 달을 담고

눈꺼풀을 닫았으니

바람은 영원히 천문학적인 부자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 그런 건 아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