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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이 쏘아올린 얼굴들 1

- 신영복의『담론』(돌베개, 2015) 을 읽고

by 박동민

○ ‘처음처럼’


우연히 합석한 사람에게 술잔을 건네듯 조심스레 말을 겁니다. 당신이 투병 중에도 마지막까지 교정하셨다는『담론』을 꺼냅니다. 책장에서 칼잠을 자던 책표지를 쓰다듬어 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손등처럼 까끌까끌하네요.

좋아했던 노래를 들으면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듯 시간여행을 합니다.『담론』이 출간된 즈음은 제가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에 근무할 때입니다. 그해 6월 6일결혼을 앞두고 중동호흡기증후군(MERS)이 창궐했습니다. 공탁업무를 하면서 평일에 휴가를 내기 어려워 지금의 아내가 결혼 준비를 도맡다시피 했던 시기입니다.

사무국장님께서 주례를 서 주겠다고 하셔서 예비신부가 인사를 드리러 오는 날이었습니다. 종합민원실 앞에서 욕을 내뱉으며 씩씩거리는 민원인과 마주쳤다고 합니다. 그 분은 공탁금 출급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과정에서 저와 말다툼을 하고 가던 참이었습니다. 당혹감과 반가움이 교차하던 그때,『담론』은 흩어져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휴지조각보다 얇아진 제 마음을 지그시 잡아주던 누름돌이었습니다. ‘작은 위로와 작지 않은 고민’을 동시에 안겨주는 묵직한 돌멩이었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했고 딸과 아들을 낳았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엔 당신이 교단에 섰던 성공회대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삼십 대의 내를 건너 마흔의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몸은 늙어 가는데 욕망은 점점 젊어집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움’은 ‘앎’에서 기원하고 ‘아름다움’의 반대는 깨달음의 부재, ‘모름다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거대한 ‘모름다움’의 아주 작은 일부입니다.


당신이 희귀 피부암으로 곁을 떠난 2016년 1월 15일 이후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인양되지 못한 세월(世越)의 진실이 여전히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은 탄핵되고 새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북미와 남북은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2020년부터 현재까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구를 덮쳤습니다.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고 기본소득이라는 화두가 제시되어 익숙했던 노동에 관한 인식을 바꿔 놓았습니다. 페미니즘 열풍이 불었고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활발합니다. 부모의 징계권 조항이 삭제되었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더 이상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대법원 2018.11.1. 2016도10912 전원합의체 판결 영창처분도 위헌판결을 받았습니다. 헌법재판소 2020. 9.24. 2017헌바157 결정 또한 대법원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통보를 무효라고 판시했습니다. 대법원 2020. 9.3. 2016두32992


▶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담론』, 20쪽, 이하 쪽수만 표시함)


▶ ‘건축’이라는 단어, 이 단어를 읽거나 생각할 때 사람마다 떠올리는 상념이 다릅니다. 아파트 분양권을 생각하는 사람, 아니면 아파트를 생각하는 사람, 또 더 나아가서 포클레인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파트 분양권을 생각하는 사람과 손때 묻은 망치를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함께 술 먹었던 목수 친구를 생각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신영복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돌베개, 2017


『담론』을 노둣돌 삼아 반복되는 일상의 감옥을 부수는 추체험(追體驗)과 사색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 짧고 긴 여행을 준비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기억할 것입니다. 잊으려 할수록 기억의 뿌리는 더 깊어지는 까닭입니다. 당신이 늘 강조하신 삼독(三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제 자신을 읽어보겠습니다. 관념의 가면을 벗고 『담론』이 쏘아올린 얼굴을 마주하겠습니다. 당신의 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진 소주 ‘처음처럼’ 계속해보겠습니다.


- 중복과 입추 사이, 여름의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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