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회 추억'과 뽀로로 친구들
○ ‘청구회 추억’과 뽀로로 친구들
7월 말에서 8월 초는 법원의 휴정 기간입니다. 보통은 지하철과 통근버스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는데 요즘은 한적인 도로를 달려 차를 몰고 직장에 도착합니다. 오전 8시 20분 내외입니다. 출퇴근길 걷기는 포기하기 힘든 즐거움이라 일단 밖으로 나왔습니다. 평소와다른 루트로 가보았습니다. 법원 청사 쪽문을 지나 검찰청을 관통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주거 지역이 나옵니다. 무성한 아파트 숲속에 위치한 조용한 호수, 연학초등학교와 인주초등학교로 이어지는 통학로가 있습니다. 차량이 적고 보행로가 잘 확보되어 있어 걷기에 맞춤한 길입니다.
▶ 『청구회 추억』을 함께 읽으면서 느끼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가 추억을 불러오는 이유는 아름다운 추억하나가 안겨 주는 위로와 정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219쪽)
1966년 서오릉 소풍 때 만난 문화동 산 17번지에 사는 꼬마들과의 인연을 담은 「청구회 추억」을 읽었습니다. 당신이 1968년 7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기까지 이어진 모임의 사연이 놀랍습니다. 중앙정보부의 심문을 받으며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의 명단을 대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사실, 꼬마들과 함께 만든 노래가사 중 ‘주먹 쥐고’가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심각한(?) 추궁을 받았다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청구회’ 인연과 비할 수 없지만 제게도 꼬마들이 생겼습니다. 스쿨존을 걷는데 여자 아이 셋과 남자 아이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미키마우스, 개구리 가방을 메고 ‘손잡고 더불어’ 제 앞길을 막고 도대체 물러설 기미가 없습니다. 무리에 바짝 다가섰을 즈음 남자 아이에게 “너 일학년이지?” 물었습니다. 곁에 있던 친구들이 “일학년 이래!!” 깔깔거리며 웃으며 남자아이를 놀렸습니다. 알고 보니 3학년이었습니다. 사과도 못하고 황급히 아이들을 앞서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며칠 뒤에 그 아이들을 또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자신 있게 “너희들 3학년이지? 아저씨가 저번에 잘못 말해서 미안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아이들은 “네! 3학년 맞아요!!” 대답하고 자기들끼리 또 깔깔거리더니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앞으로 뛰어갔습니다. 그 후 다시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는 바람에 그 아이들을 여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꼬마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이름을 따서 모임을 ‘청구회’ 라 명명했듯 저도 꼬마 무리의 이름을 ‘뽀로로 친구들’로 정해놓았습니다. 뽀로로, 크롱, 루피, 패티 이렇게 넷을 각각 아이들의 얼굴에 대입해 봅니다. ‘크롱’이 마음에 걸립니다.
천천히 걸으면 운전대를 잡고 앞만 주시해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들에 눈길이 가고 까치나 박새, 직박구리 소리에 뒤를 돌아봅니다. 무엇보다 성긴 그물이지만 만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가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그림자의 길라잡이를 하면 그림자는 엄마 치맛자락을 붙드는 아이처럼 저를 따라옵니다. 주인을 산책시키는 반려견이 된 기분입니다. 시간은 짧지만 생각은 긴 아침 소풍은 바깥으로 내딛는 동시에 제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설렌 발걸음입니다.
- 8월 말복과 광복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