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담론』이 쏘아올린 얼굴들 3

시경(詩經), 겨울비를 놓치고 봄눈에서 내리다

by 박동민

〇 시경(詩經), 겨울비를 놓치고 봄눈에서 내리다


『담론』제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에서 당신이 먼저 꺼내신 이야기는 시경(詩經)입니다. 춘추전국시대 널리 유행하던 시가를 채집관이 모아 추린 책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처음 시를 만난 순간이 언제인가 떠올려보았습니다.

매년 10월 초에는 ‘와우북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독립출판사부터 대형출판사까지 홍대인근에 부스를 설치하고 책을 홍보하고 독자와 만나는 이벤트를 열고 있습니다. 국내외 작가들을 초청해 강연과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합니다. 2015년 10월 1일 저녁, 서교예술센터에서 ‘글쓰기 글램핑’에 참여했습니다. 강연의 모토는 '자화상, 아이처럼 내가 나를 신나게 골똘히 들여다보기'. 시집 날개에 실린 사진으로만 보던 이원 시인이 중앙에 등장했습니다. 시인을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라 사막에서 태어난 아이가 눈 오는 바닷가를 처음 본 것처럼 낯설고 설렜습니다.


“창의적, 인문적이란 말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데요. 저는 인문적 글쓰기란 표면과 안을 동시에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겉과 속의 공존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죠. 흔히들 글쓰기는 내면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표면도 중요해요.” (이원)

하얀 스크린에 한 장의 사진이 걸렸습니다. 기차가 지나간 철로에 한두 명 사람이 보이고 사방은 어둡습니다. 사진에 대한 설명이 밑에 나옵니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인사'

1) ( )를 놓치고, ( )에서 내린다. 그리하여 ( )을 바꾼다.

2) 밖의 내가 안의 나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말 적기

3분 정도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참여자가 열 명이 안 되어 돌아가며 자기 글을 읽었습니다. 꿈을 놓치고 일에 내린 대학생, 혼기를 놓치고 웨딩 카에서 내렸다는 직장인 (···). 제 차례가 왔습니다.

'겨울비를 놓치고, 봄눈에서 내린다. 그리하여 얼굴을 바꾼다.‘

20대는 옥살이처럼 추웠지만 접은 신문지만 한 볕이 비추는 시기가 올 거라는 희망의 기척, 눈이 녹는 건 슬퍼도 봄이 오니 좋고, 제 얼굴이 ‘이 세상에 없는 계절’ 이 되고 싶었습니다. 삶에는 진폭이 있습니다. 진폭의 고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기에게 맞는 주파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리저리 부딪혀 가며 자신만의 주파수를 찾는 과정이 자화상을 그려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인은 문장에서 흐느낌이 느껴진다고 하셨습니다. 강연 뒤에 챙겨간 시집에 사인을 부탁드렸습니다. “혹시 시를 쓰니” 물으셨습니다. 저는 당황했고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시집 읽는 것을 좋아하고 가끔 블로그에 메모 정도 하던 시절이라 감히 시를 쓴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처음 시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후 부천의 송내 도서관에서 기획한 시 창작교실을 등록해서 꼬박 1년을 다녔습니다. 화요일 저녁마다 매주 1편 제가 쓴 시를 보여드렸습니다. 이메일을 뒤져 첫 수업 때 보낸 시를 찾았습니다. 대학시절 지도교수님 얼굴을 생각하며 쓴 것입니다. 대학원 원장까지 맡으시며 활발히 활동하시던 중 루게릭병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온몸의 근육을 쓰시지 못하고 눈동자만 끔벅거리며 겨우 글자판의 자모음을 조합하여 의사소통을 하고 계십니다. 1988년 광복절을 맞아 가석방으로 출소한 당신이 자리 잡은 곳이 우이(牛耳)동이었죠? ‘쇠귀’라는 낙관이 찍힌 당신의 글씨를 생각합니다.


★ 와우(臥牛)

구름다리 위 드러누운 한 덩이// 눈을 한 번 끔벅/ 또 한 번 끔벅// 눈빛으로 자음과 모음을 빚어 게운 첫 문장/ 왔냐// 서서히 달궈져 육즙이 배어나면 한 번 뒤집고/샛노란 가래가 끓을 즈음 또 한 번 뒤집어야 맛있다// 풀만 먹고 자란 그가/ 누런 이를 내보이며 흘린 또 한 문장/ 고기를 먹어// 뜨끈한 여물통을 두 그릇씩 비워 내던/ 한잔 할 땐 친구라던/ 와우의 되새김질// 삐뚤어진 코뚜레를 연신 밀어 올리며// 한 번은 음- 무- , 소리 없이/ 또 한 번 음- 무- , 환하게 춤춘다// 불판 위의 그가 거뭇한 눈썹을 흔들며// 눈을 한 번 끔벅/ 또 한 번 끔벅/ 꼭꼭 씹어 게운 마지막 문장/ 그만 가라// 속이 더부룩했을까/ 네 다리를 뻗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칠년을 한 호흡에 담아 우는 매미처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담론』이 쏘아올린 얼굴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