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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진화일지 2

당신의 첫, 가출과 가족사진

by 박동민

■ 당신의 첫, 가출과 가족사진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7쪽, 이후 페이지만 표시, 밑줄은 인용자)



이런 첫 문장을 읽고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칼의 노래》(김훈)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안나 카레니나》(톨스토이)의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말다툼을 하는 부모의 말을 엿듣는 열일곱 ‘고아리’가 읽던 《이방인》(까뮈)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에 비견되는 충격. 치매를 앓던 여든둘 ‘고상욱’이 노동절 새벽에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뇌출혈로 삶을 마감했다는 건조하고 냉정한 평가, 선언문이나 비문 같은 첫 문장에서 아버지의 죽음 자체는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의지를 느꼈다.



나의 아버지 ‘박석제’는 열여덟에 출가 같은 가출을 감행했다. 할머니가 장에 가 팔아오라고 건넨 닭 두 마리로 마련한 460원을 들고 1964년 8월 14일 무작정 부산으로 튀었다. 큰아버지가 대구로 유학을 떠난 이후 농사일과 가축의 돌봄은 오롯이 차남인 아버지 몫이 되었다. 그 시절 ‘일감 몰아주기’가 얼마나 서러웠던지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그 기억을 꺼낸다. 자동차로 좁은 산길을 달리다가 저 멀리 보이는 돌산을 가리키며 “느그 할배 할매는 학교는 안가도 소는 멕이야 된다꼬 하면서 내를 산으로 보냈다.”, “그러니까 느그는 책을 한 자라도 더 보고 큰 데로 가야지.” 같은 말이 후렴처럼 이어진다. “아빠, 이제 그만 좀 말해요.” 2절은 커트. 부산에서 아버지는 먼 친척 집에 신세를 지면서 자동차 기술을 배웠다. 빵꾸를 때우고 라이닝을 교체하며 기름밥을 먹기 시작했다. 훗날 자신만의 사업장을 가지는 꿈을 꾸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글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스트리트 스마트였다. 아버지는 하루를 최대한 길게 늘이려고 꼭두새벽에 일어났고, 끝나려는 하루를 늦추고 또 늦추는 사람이다.



도회지에서 기반을 잡고 아버지는 돌아온 탕아처럼 고향을 찾았다. 합천 오일장에서 그릇 집 장녀인 어머니를 소개 받았다. 어머니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키가 작은 기 쪼메 맘에 걸리긴 했는데 목소리 하나 우렁차서 그기 맘에 들었다.”고 했다. 스물일곱에 부산 동래구 동산동에 살림을 차린 이후 마산, 창원으로 수차례 이사를 거듭하던 아버지는 칠순이 넘은 지금까지 운전대를 잡고 웬만한 차 고장은 직접 고친다.



▶그날 우리 가족은 구례로 와서 친지들과 자장면을 먹고, 누구 생각이었는지 사진관에 가서 고상욱 출소 기념이라는 큰 글자가 박힌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 옆에 선 나는 그 순간이 못 견디게 어색해서 퉁퉁 부은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물론 아버지는 그때도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사시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226-227쪽)



1980년 8월 15일 광주교도소에서 석방된 ‘고상욱’의 출소기념 가족사진 장면을 읽으며 창원 본가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계획도 없이 급작스레 찍은 것이다. 2011년 겨울 어머니가 췌장암 진단을 받고 급히 수술 일정을 잡았다. 아버지는 무조건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았다. ‘엄마가 죽기 전에’ 라는 말이 생각된 거란 걸. 포토샵 덕분에 비현실적인 얼굴의 인물들이 의자에 앉거나 기대서서 정면을 응시하는데 마치 졸업앨범이나 웨딩사진 원본을 다시 꺼내 보는 것 같이 민망할 때도 있다. 나와 동생이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며느리, 사위, 손주도 생겼지만 오롯이 우리 네 가족의 사진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흘러가는 말처럼 아버지가 다른 가족들 빼고 우리 넷만 어디 사나흘 다녀올까, 하던 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당신의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거실 중앙 벽면에 위치한 사진 속의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긴 아버지를 바라보는 장면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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