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2
소설의 머릿돌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시작하자.
높이가 8미터에 이르는 ‘벽’은 빈틈없이 견고하고 완벽하다. 그러나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벽의 특성과는 별개로 벽의 실존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꿈, 본체와 그림자, 삶과 죽음, 의식과 마음 같은 ‘벽’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 나가는 과정이 이 소설을 읽는 기쁨 중 하나다.
나는 이 작품이 구조적, 내용적으로 ‘이인삼각’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인삼각(二人三脚) 사전적 의미는 ‘두 사람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맞닿은 쪽의 발목을 묶고 세 발처럼 하여 함께 뛰는 경기’다. 각脚은 月(육달 월)과 却(물리칠 각)이 합쳐진 글자인데, 却(각)은 去(가다)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을 본뜬 병부 절(卩)이 합쳐진 글자로 ‘의지하다’는 뜻도 파생된다.
구조적으로 소설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현실 세계와 가상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챕터씩 번갈아 가며 동시 진행한다. 2부는 실제 세계의 산골 마을 도서관을 중심으로, 3부에서는 실제와 가상이 오고간다. ‘나’와 ‘너’가, 도시와 도시 바깥이, 현실과 비현실이, 현실과 꿈이, 삶과 죽음이, 의식과 마음이 각각 한 발 씩 내밀어 발목을 묶고 어깨를 겯은 채 달린다. 묶인 발목 같은 ‘벽’은 통제, 억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인삼각의 중심축으로서 스토리에 숨을 불어넣고 이야기를 추동하는 힘이다.
벽은 무엇일까. 절대적 타자로서 ‘아버지’ 같은 존재일까.
2부의 현실 세계에서 산골 마을 도서관장으로 일하는 ‘나’는 한 소년을 알게 된다. 전임 관장이자 그림자 없는 인간(유령)인 ‘고다쓰’의 무덤가에서 내뱉는 ‘나’의 독백을 소년이 엿듣는다. 소년은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나’가 묘사한 도시를 지도에 재현해낸다. 늘 옐로 서브마린이 그려진 파카를 입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소년은 ‘나’에게 도시의 벽은 “역병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역병은 아니고 “비유로서의 역병”, “영혼이 앓는 역병”, “끝나지 않는 역병”(527쪽, 528쪽)을 뜻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시로 증발해 버린 소년을 찾는 그의 형이 말하듯 벽은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651쪽), 빙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가라앉아 감춰져” 있는 독자적인 의지와 생명력을 지닌 마음의 상태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렇게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벽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684쪽)
나는 “비유로서의 역병”이라는 문구를 실제의 역병이라는 의미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으로 받아들였다. 하루키는 동명(同名)의 중편(1985년)과『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95)의 ‘세계의 끝’ 부분을 확장해『도시와 벽』을 완성했다. 변화무쌍한 코로나19라는 벽에 둘러싸인 2021년, 저자는 집필 중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느낀 내면의 불안과 고뇌가 이 소설에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자를 떼어내고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코로나19 이전의 삶을 한동안 잊었던 우리처럼 ‘집합적 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 “지리에 대한 수평적 호기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수직적 호기심”도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격리되었다. 페스트, 메르스, 코로나와의 전쟁은 인간의 육체 뿐 아니라 마음도 찢어발긴다. 일본의 전쟁 역사인 ‘노몬한 사건(1939년 일본 만주국과 몽골의 영토전쟁)’에 대해 다룬『태엽감은 새 연대기』이래 하루키는 ‘집합적 기억’인 역사에 대한 언급을 꾸준히 해왔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일본정부와 일본 국민의 자기책임회피, 역사왜곡을 일삼는 일본 우익, 중국의 홍콩 민주화 요구 탄압, 유럽의 배타적인 난민정책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하루키는 대중문학 작가일 뿐이고 노벨상을 의식하고 작품을 쓴다는 비난은 지나치다.
그렇다면 변화무쌍한 벽 앞에 선 우리는 어떡해야 하나. 1) 젤리처럼 물렁물렁한 벽이라고 믿고 벽을 정면 돌파하기 2) 토끼처럼 굴을 파서 벽 밑으로 지나가기 3) 새처럼 날아올라 벽을 뛰어넘기. 어느 것도 만만치 않다. 의식의 벽에 부딪쳤을 때 이인삼각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핸디캡이 있을 때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벽이 우리를 통과하게 하면 된다. 벽을 옮기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벽이 되자. 술래를 피해 옷장에 숨은 아이처럼 벽속에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짜잔, 하고 벽에 문을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