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옥중수상록,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을 읽고 1
■ 들어가며
나는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갓난이 때 마산으로 이사했고 창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변성기가 지난 성가 대원처럼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와서 2021년 만 나이로 마흔을 맞이했다. 내 인생의 허리를 뚝 자르면 하체에 해당되는 198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현재의 우리나라 사회를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87년 체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야권 분열로 탄생한 노태우 정권, 1991년 독일통일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990년 3당 합당의 결과로 선출된 문민정부, 1996년 OECD가입, 1997년 말 IMF 위기와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탄생한 국민의 정부까지. 물론 내가 그 당시 역사적 사건을 세세히 기억하거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사후 추체험과 미디어를 통해 재구성된 기억이 대부분이다. 다만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은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날 학교 정문에 펄럭이던 만국기.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뿐 아니라 갓 수교관계를 맺은 중국과 러시아 국기도 있었을 것이다. 가끔 하굣길에 최루탄 냄새 때문에 코와 입을 틀어막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던 기억도 난다. 상체에 해당되는 스물 살 이후는 비교적 또렷이 생각난다. 2002년 월드컵과 참여정부의 출범,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산 쇠고기 촛불 집회, 2009년 용산참사,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2012년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2014년 세월호 참사,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스크린 도어 정비업체 직원 사망사고, 2016년 말부터 2017년의 대통령 탄핵과 촛불혁명의 문재인 정부, 2017년 이후의 미투 운동, 2018년 버닝썬 사건, 2018년 태안 화력 발전소 사건(‘김용균 사건’), 2019년 n번방 사건, 스쿨 존 교통사고(‘민식이 사건’), 2020년 입양아 학대 사건(‘정인이 사건’).
전 통합진보당 국회위원인 저자가 쓴 이 책의 부제는 ‘이석기 옥중수상록(이하 옥중수상록)’이다. 수형생활이나 출소 이후 옥중생활에 관해 글을 쓴 작가나 그 작품은 많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투옥생활을 한 故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우선 떠오른다. 저자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해산결정과 그 소속위원의 자격상실,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확정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다. 개인적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당시 정권과 권력자에 대한 강한 비판을 예상했는데 전체적인 글의 어조는 차분하다. 햇빛 속에서 차분히 먼지가 내려앉듯 오랜 수감생활 가운데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을 다듬었을 것이다. 이 책은 옥중에세이가 아니라 한 권의 사상서다.
► 이 책은 그동안 내가 해 오던 생각들을 나름대로 자르고 붙이고 하여 새로 쓴 것입니다. 크게 보면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내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살아온 이야기들이 있고, 수년간 옥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이 있고, 또 감옥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우리나라의 안과 바깥으로 나누어 적은 것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옥중수상록, 13쪽 서문 중에서)
이 책은 거울 같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나는 가끔 내가 기계처럼 느껴진다. 기상, 출근, 직장 업무, 퇴근, 육아로 이어지는 일상의 감옥에 갇혀 사는 요즘, 물리적으로 나는 감옥 밖에 있지만 감옥 안에 있는 저자와 무엇이 다를까. 위 서문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바꿔 보았다.
► 이 글은 내가 해 오던 생각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크게 보면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내가 직장에 들어오기 전(대학과 수험생활)에 살아온 이야기들이 있고, 수년간 직업인으로 생활하면서 겪은 이야기들(법원공무원, 결혼과 육아)이 있고, 또 감옥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우리나라의 안과 바깥으로 나누어 적은 것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어가며 틈틈이 메모했다. 그것을 구름판 삼아 나만의 ‘짧은 옥외수상록’을 쓴다. “인간은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주1) 이기 때문이다.
주1)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2018, 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