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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진화일지 4

보수적 사회주의자

by 박동민

■ 보수적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정치적 지향은 보수지만 행동은 유물론과 현실주의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한 종교에 심취하지도 배타적이지도 않았다. 엄마가 절에 가자면 절에 가고 친척이 교회에 가자고 수차례 조르면 못 이기는 척 한 번은 따라갔다. “종교 있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밸로 없다.” 수능 성적표를 든 여동생이 지방 국립대와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을 고민할 때도 아버지는 동생의 선택을 존중했고 기왕이면 서울로 가길 바랐다. 많이 배우고 경험하면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잘살 수 있다고 믿는 평등주의자다.


▶ “머시매들은 밤새 놀아도 되고 가시내들은 밤새 놀먼 안 된당가? 고거이 남녀평등이여? 자네는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아니그마!” 아빠 한마디에 엄마의 잔소리가 쏙 들어갔다. 나는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신작로를 걸어 나가곤 했다.(정지아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마디북, 2023, 23쪽)

▶ 옷 털고 손 좀 닦자는데 웬 사회주의?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읽고 있던 니체를 내려놓고 아버지를 주시했다. “사회주의의 기본은 뭐여?” 속도 없는 어머니, 아는 것 나왔다고 냉큼 알은 척을 하고 나섰다. “그야 유물론이제라.” “글제! 글먼, 머리는 둿다 뭐혀! 생각혀봐. 사람은 하나님이 여개 사람이 있어라, 고런 시답잖은 말 한마디 했다고 하늘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먼지로부터 시작됐다 이 말이여. 긍게 자네가 시방 쓸고 담고 악다구니를 허는 것이 다 우리 인간의 시원 아니겄어? 사회주의자는 일상에서부텀 유물론자로 살아야 하는 법이여.” (15-16쪽, 밑줄은 인용자)


빨치산 출신 순수 사회주의자, 동네 머슴, 물정 모르는 촌뜨기 ‘고상욱’이 유물론과 사회주의에 대한 일장 연설을 할 때 그의 딸 ‘고아리’는 니체를 읽고 있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그 사람. 니체는 사회주의를 ‘가짜 신’이라고 했다. 평등은 약한 자들, 노예 의식을 가진 자들이 원한 감정(Ressentiment)에 사무쳐서 만든 “노예의 도덕”이라 했다. 그럼 자본주의가 옳은가? 그는 사회주의 다음에 도래할 가짜 신이 자본주의라고 했다. 니체는 자연주의자였다. 힘에 의한 의지로 똘똘 뭉쳐진 자연을 거스르는 허무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를 경멸했다.


신(종교)과 이념은 허구의 산물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문명과 국가를 세우고 문화를 발전케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상위포식자가 된 것은 언어와 함께 사상과 이념, 종교 같은 허구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도 인간이 창조한 이념적 도구 중 하나다. 사회주의 실험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기점으로 20세기 후반에 실패로 잠정 결론이 났다.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가를 노동자의 이익을 착취하고 수탈한 세력으로 치부하고 인간의 욕망을 전적으로 무시했다. 오히려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소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데도 사상이나 제도로 이를 막는 것은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은 폴세 틀레묵은 것”(175쪽)이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이며 노골적으로 얘기해 노동자가 죽지 않고 다음날 나와서 일할 수 있게 만드는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라는 일갈은 너무 급진적이다.(임승수, 앞의 책, 118쪽) 그럼에도 극단적 자본주의로 치닫는 사회에서 사회주의적 요소와 그 정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수 년 간 코로나19 시대를 살면서 우리의 생활패턴과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법원에서도 재택근무를 순환적으로 실시하면서 일주일에 나흘 일하고도 정상적으로 업무가 이루어질 수 있고 단위 시간 당 업무 효율도 꽤 높아졌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코로나19가 주 4일제 도입을 10년은 앞당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생산량과 반비례로 사람들의 일자리와 가처분소득은 줄어들 것이다. ‘노동 없이는 소득 없다’는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구호는 수정될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된 초과이익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재분배하고 구성원의 일자리를 보장할 것인가가 큰 화두인 시대다. 호모 사피엔스는 시장 경제에서 생산이 아닌 소비주체로서만 기여해야 할지도 모른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대량해고로 발생할 부작용을 막고 기본소득 지급과 과감한 복지 정책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1쪽)


생명은 생존과 번식으로 자신을 무한 증식해 가려는 유전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생존 기계다. 동시에 인간은 서로 공감하고 협력하는 존재다. 이타행동을 하는 이기적 존재가 인간이다. 돈과 시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도 돈만 더 낸다고 응급실이나 화장실 줄서기가 면제되는 사회가 되지는 말자. 극단적인 자본주의적 발상으로부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지켜내야 한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인류애”라고 말했다. 대뇌피질에는 ‘거울신경세포’가 있다. 연민, 공감, 연대 의식을 담당하는 세포다. 이를 제도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사회주의다.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을 가진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다.


사회주의적 제도에 대한 구성원의 공감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고 5년짜리 정권이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누적된 기득권층의 공고한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벽이 훨씬 두텁다. 긴 호흡으로 일상에서부터 구성원이 사회주의 요소의 효능감을 체감해가는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축적되어야 비로소 변화의 형체가 보일 것이다. 故 노회찬 의원의 말처럼 그것이 ‘사회의 공기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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