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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진화일지 5

동생의 눈으로 본 형의 세상

by 박동민

■ 동생의 눈으로 본 형의 세상



1948년 가을, 군인들이 집집을 불태우고 자욱한 연기 속의 반내골, 마을 정자 옆에 눈도 감지 못한 채 주검으로 누운 할아버지 곁에서 오줌을 지린 채 까무러친 아홉 살 작은 아버지 ‘고상호’. 형 ‘고상욱’을 평생 원망하며 살아 온 작은 아버지의 사연은 이 한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꿀 먹은 병어리처럼 말을 잃고 술만 퍼 마시며 사는 작은 아버지.


▶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열흘 뒤 아버지 고상욱이 소속된 14연대가 반내골에서 잔치를 벌이고 사라진 뒤 총을 든 외지 군인들이 초등학교 교실로 들이닥쳐 “고상욱이 본 사람 손들어!”(126쪽) 외쳤을 때 “고상욱이 우리 짝은성인디요! 짝은성이 문척멘당위원장잉마요.” 라고 자랑스레 외친 작은 아버지, 그로 인해 희생된 구장인 할아버지.


내가 살던 마산에서는 1990년대 초에도 심심찮게 시위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하굣길에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찌르고 눈물, 콧물이 멈추지 않아 집으로 달려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덮어야 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국정 교과서에는 여순사건이 스치듯 건조하게 적혀 있었다. 전남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제14연대 군인들이 좌익 세력의 선동으로 1948년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15,000명 이상의 존재도 몰랐다. 소설에서 고상욱과 고상호 간의 갈등은 단순히 가족사가 아니다. 우리 현대사가 초래한 비극이다.


1948년 10월 19일 20시에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14연대에 하달되었다. 병사들은 제주도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한 출동을 거부했다. 여순사건은 연대 하사관들에 의해 즉흥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시민과 인민위원회가 대거 가담함으로써 대중봉기로 발전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민족주의 우익과 공산주의자의 연합으로 사건이 발생했다던 초기 발표를 수정하고 전남 현지의 좌익분자들이 계획적, 조직적으로 군대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미 국무성이 배후로 발표한 남로당은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 그저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집안 망하고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사사건건 아버지를 원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홉 살 작은 아버지는 잘난 형 자랑을 했을 뿐이다. 그 자랑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작은아버지는 평생 빨갱이가 아니라 자랑이었던 아홉 살 시절의 형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술에 취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작은아버지의 인생이, 오직 아버지에게만 향했던 그의 분노가, 처음으로 애처로웠다. (129쪽)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14연대에 제주토벌을 명령했고, 병사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 거부는 반란은 물론 항명도 아니다. 동포를 학살하라는 명령은 위법한 명령이며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없다. 군인의 직무는 국토를 방위하는 것이지 국민을 학살하는 것이 아니다.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군인 세력이 일으킨 5·16과 12·12 군사쿠데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승만의 ‘어린아이들까지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를 다 제거하고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라’고 담화는 광주 시민의 학살을 명령한 전두환의 행동과 닮았다. 제주 4·3과 여순사건은 이란성 쌍둥이다. 여순사건은 반드시 ‘여순 민중항쟁’으로 명명되어야 한다.


나의 아버지 ‘박석제’가 살았던 1960대를 생각한다. 책 보따리와 구멍 난 신발을 신고 코를 질질 흘리며 흙길을 걸어가는 어린 아버지. 전교 회장이었던 큰아버지가 조회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힘차게 구령을 붙이는 형의 뒷모습을 자랑스럽고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의 아버지, 박석제의 눈빛을 오래된 앨범에서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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