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장례식과 일기장
■ 아버지의 장례식과 일기장
올해 추석은 10월 2일이 임시공휴일이 되면서 6일의 긴 연휴가 생겼다. 마당에 둘러앉아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합천에서 가져 온 마늘과 알밤을 까며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유년 시절, 결혼 즈음과 80년대, 90년대 나를 키우던 시기의 말씀을 들었다. 처음 듣는 얘기도 있었고 내가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다른 사실도 많았다. 기대 수명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온전한 기억으로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이십 여년 정도 밖에 안 남았구나, 생각했다.
▶ 사촌들 세 테이블, 외가 한 테이블, 아버지의 옛 동료들 두 테이블, 박선생이 어미 새처럼 물어 나르는 35 동창회와 구례 사람들, 서로 얼굴을 아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그게 아버지가 평생 살아온 세월이었다. 35 동창들은 소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함께 했고, 빨치산 어른들은 청춘을 함께했다. 곡성 가톨릭농민회, 구례 민노당원들은 감옥에서 출소한 아버지가 이 세상과 어우러지며 만든 인연이었다. (211쪽)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남부군 출신 사회주의자이자 척추협착증으로 행동이 굼뜬 깔끔쟁이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1965년생 대학 시간강사 빨치산의 딸 ‘고아리’, 아버지와 중앙초교 35회 졸업 동기동창으로 삼오시계방 주인이자 전직 교련선생인 박한우, 아버지의 동지 황길수의 아들로 장례식장 공동 사장인 ‘황 사장’, 민노당원이자 동네 머슴인 박동식, 어머니의 연락책 동료의 딸로 장례식장에서 일하며 물심양면으로 고아리를 돕는 떡집 언니, 고아리의 사촌 언니들과 그 자녀들, 아버지와 담배 친구로 엄마가 베트남 이주 노동자인 노란 머리 소녀 등등. 고상욱의 장례식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자 한 인간을 둘러싼 세속적인 인간형의 집합이었다.
▶ 반내골은 조용했다. 오후 여섯 시, 다들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가까운 친척들은 장례 일정에 지쳐 일찌감치 뻗었을 터였다. 서울 사람이 사놓고 어쩌다 들른다는 옛 집터와 밤밭, 미수로 끝난 가출 사건의 진원지 너럭바위, 작은아버지 집 앞, 그리고 지금은 노인정이 된, 할아버지 죽었다는 옛 정자 앞에도 아버지의 흔적을 조금씩 남겼다. 아버지가 소년처럼 첨벙거리며 뛰어다니던 개울에도. 어떤 일이든 에너지랄지 기운 같은 게 남아 저 홀로 외로워(260쪽)하고 있다면 부디 화해하기를 바라면서. 혈육보다 이데올로기를 택했던 아버지의 한점 영혼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오줌을 싸며 혼절한 아홉살 작은아버지의 감당하기 어려운 쓰라림을 어루만져주길 바라면서. (261쪽)
이십 년 후면 나에게 닥쳐올 아버지의 장례식을 생각했다. 준비성이 철저한 아버지는 미리 영정사진을 찍어놓았을 것이다. 십여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서둘러 가족사진을 찍자고 채근한 것처럼. 상주 휴게실에서 엄마와 이모들이 지친 몸뚱이를 뉘고 얘기를 나누고 빈소에는 아버지와 기사 휴게실에서 밤새 고스톱을 치던 아저씨들이 찾아올 것이다. 담배를 많이 피우던 정 기사, 회사를 그만두고 복국 집을 차렸다는 이 주임, 신 마산 달동네에서 담벼락 하나 사이에 두고 지내던 준호 아버지, 선경 엄마와 계 모임 친구들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조문실로 들어와 내 손을 꼭 쥘 것이다.
조위함과 방명록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아버지와 내가 함께한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려볼 것이다. 목욕탕을 다녀와 같이 먹던 빙그레 바나나 우유, 추석 즈음이면 할머니가 키우던 잡종견 ‘메리’를 앞장세우고 밤 밭에서 밤을 줍던 기억, 국민차 ‘티코’를 타고 팬티 바람에 시내를 드라이브 하던 기억, 철 지난 달력으로 국어책과 산수책의 표지를 싸 주던 기억, 인조잔디가 깔린 사직야구장에 처음 갔던 기억, 묵직한 표준전과를 사들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기억, 벚꽃이 만발한 진해 군항제 야시장을 갔던 기억, 탱크로리 탑차를 처음 사고 지입 계약서를 쓰러 배차 차장을 만나러 갔던 기억도. 장례식장에는 경쾌한 음악을 틀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나훈아 메들리가 장례식장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 관망실에서 불타는 아버지의 육신을 바라본다. 당신은 떠났지만 계속 떠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뒤풀이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뒤풀이처럼 아버지는 내 안에서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 아버지의 일기장
안개비가 왔다 집에 들렀다 머리를 괸 아들이 미동도 없다 밑반찬을 꺼내 몇 숟갈 뜨다가 내려놓았다 밥값을 하라고 다그쳤다 뺨을 후려쳤다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이 노려 보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눈이었다 각진 눈빛으로 서 있는 빈틈없는 어깨가 무서웠다
나는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는 맡은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흥연기 없이 대본에 충실한 배우로 또박또박 살아왔다 도시락은 늘 두 개였고 씻고 씻어도 기름 냄새가 났다 기름밥을 먹을수록 아이들은 버드나무처럼 쑥쑥 자랐고 내 마음은 졸아들었다
이튿날 오후에도 맡은 바를 다했다 탱크로리 안에서 웅크리고 종일 용접을 하는데 어둠 속에서 탱자나무 가시 같은 불꽃이 튀었고 나는 쓰러졌다 용서하지 못해 벌 받는구나, 학교 대신 산으로 보냈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호두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스레한 입구를 비집고 들어오는 뭉툭한 손, 밤나무골에서 도망친 그날처럼 밖으로 나왔다 뒤늦은 저녁을 먹으며 잊었던 용서를 찾는다 용서는 맡은 바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