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 나는 왜 쓰는가
■ 나는 왜 쓰는가
늘 쓰고 싶다. 물론 마음대로 안 된다. 매일 읽고 가끔 쓴다. 읽다 보면 쓰고 싶다. 읽고 쓰는 순간만큼은 나와 마주볼 수 있다. 요즘은 쓰기 위해 읽는다. 쓰는 데는 약간의 결심이 필요하다. 러닝을 위해 신발 끈을 질끈 고쳐 묶는 것처럼. 나는 무엇을 쓰고 있나. 거창하게 소설이나 논문은 아니다. 메모나 100자 내외의 서평이다. 싱어송라이터가 순간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녹음하는 것처럼 ‘문득’을 쓴다.
▶ 2012년 겨울, 그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이하 ‘작별’), 17쪽)
▶ 그때 알았다. 인선이 줄곧 나를 생각해왔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약속했던 프로젝트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 년 전 내가 꾼 꿈속의 검은 나무들을, 그 꿈의 근원이었던 그 책을. (작별, 57쪽)
한강의 소설《작별》의 중심인물인 ‘경하’와 ‘인선’도 읽고 쓰는 사람이다. 경하는 2014년 여름, 도시의 학살에 관한 책을 출간한 뒤 검은 나무들이 나오는 기묘한 꿈을 꾼다. ‘작별 편지’(유서)를 미리 써 둘 정도로 위경련과 편두통을 비롯한 고통에 시달린다. 경하는 전직 사진기자이자 다큐멘터리를 찍는 친구 인선에게 기록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제주 4·3 사건을 상징하는 그 프로젝트(‘작별하지 않는다’)의 진행은 지지부진하고 사 년이 흐른다. 인선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여의고, 제주 중산간에 있는 자신의 목공방에서 작업 중에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잘리는 사고를 당한다. 인선이 입원한 서울의 병원을 찾은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받는다. 제주에 두고 온 앵무새 ‘아마’를 구해줘, 제주로 내려가 달라고, 지금 당장!
그들은 왜 쓰는가. 작가는 어떤 이유로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양장본의 표지를 벗기고 작가의 말을 바라본다. “2014년 6월에 이 책의 첫 두 페이지를 썼다. 2018년 세밑에야 그다음을 이어 쓰기 시작했으니”(작별, 328쪽). 짐작건대 이 소설의 머릿돌은 2014년 4월의 세월호 사건이리라. 경하가 썼다는 K시의 학살에 관한 책은 5·18 민주항쟁을 다룬 《소년이 온다》 같은 소설이 아니었을까. 2017년 3월 대통령을 탄핵하고 세월호를 마침내 인양했다. 그럼에도 진실은 여전히 심해에 가라앉아 있다. 세월(世越)과 세월(歲月)의 간극에서 작가는 묵혀 둔 제주 4·3에 관한 소설을 이어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생계 문제를 제외하고, 글을 쓰는 동기를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으로 정리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쓰는가. 대체로 위 네 가지 목적이 뒤섞여 있다. 돌이켜보면 처음은 나를 치유하는 목적이었다. 30대 초반까지 공부에 매달렸고 그 즈음 어머니가 췌장암 때문에 큰 수술을 받으셨다. 공채시험에 합격한 뒤 발령 대기 중 어머니 곁에서 투병과정을 지켜보았다. 긴 소풍 같았던 그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와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어머니는 살아계신다. 자책과 죄책이 켜켜이 쌓였다가 조금씩 내 몸 밖으로 새어나와 물약처럼 종이 위에 똑똑 흔적을 남겼다. 내 마음 속에서 어머니는 그때 처음 돌아가셨다. 가끔 전화통화를 하고 얼굴을 뵙는 일이 혼령과 대화한다고 느낄 때도 있다. 나는 어머니의 두 번째 죽음을 미리 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설 2부, 3부에 나오는 경하와 앵무새 ‘아마’, 경하와 인선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대화를 통한 교감에 공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순전한 이기심과 미학적 열정과 더불어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의 비율을 조금 더 높인 글을 쓰고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며 제주 4·3을 오래 생각했다. 한 달 남짓 이 소설을 겪었다. 그 기억과 경험을 질료 삼아 여기에 흔적을 남긴다. 종종걸음으로, 새하얀 눈밭에 찍힌 새의 발자국처럼, 경하가 ‘아마’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선의 집으로 향하듯 그렇게.